한줄 詩

장마 속의 백일몽 - 박판식

마루안 2018. 7. 1. 10:55

 

 

장마 속의 백일몽 - 박판식


성긴 옷감과 빠진 머리카락들과 뭉쳐서 나는 잠을 잔다
비통한 안개에 둘러싸여 어둠침침한 저녁과 싸우면서
별들은 낮에도 무섭도록 환하고
빛나는 여름은 구름 위에서 쾌청한데
나는 수초를 쓰다듬는 낡은 목선의 밑창
입가에 웃음을 머금은 채 모래 속에 머리를 처박고 죽은 돌고래
나는 잠 속에서도 발가벗은 채
내 손에 닿으면 부끄러워 오므라드는 능금 하나를 꼭 쥐고 있다
실용성이라곤 조금도 없는 감정
잠의 코뜨개바늘은 감정과 육체를 꿰매어 나를 보잘것없는 몸뚱이로 만들고
파도가 빈 술병과 버려진 가정용품들과 사투를 벌이는 동안
능금은 아궁이에 지핀 붉은 불로 바뀐다
나는 짚 덤불 위에 웅크리고 누워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 잠든 사나이

 

 

*시집, 밤의 피치카토, 천년의시작

 

 

 

 

 

 

만질 수 없는 구름 - 박판식                                               


나라고 해도 어쩔 수가 없었을 것이다
새들은 이곳을 떠났다 남쪽으로 멀리
쇠약해진 나비들은 비열하게 시든 엉겅퀴 향기에 취해 있다
다정한 창문이 흔들리는 등불을 지켜주고
거미들은 여름밤의 균열 속에 짝짓기를 하고 있다
문득 길에 쓰러져 죽지는 않으리라 각오를 했다
그 사이 제대할 때 신고 나온 군화는 신장 속에서 낡은 일가를 이루었다
메타세쿼이아 뿌리가 들어올린 힘없는 대지여
내가 그대 손에 더 이상 아무것도 쥐어 줄 게 없다는 것을 알았다
내가 그대를 떠난 것은 사랑이 없어서가 아니다
죽기 위해 구름으로 뒤덮인 하늘에 날개를 펼치고 드러누운 새여
굶주린 눈물샘 속에서 말라죽은 수목들이여
나는 구름도 아니고 구름도 아니지만 그리움에 취해 떠도는 한낱 물방울에 불과하지만

 

 

 

 

*自序

 

눈물 속의 홍방울새

 

굶주림과 눈물을 운반하는 새여

나는 너에게 축복과 기쁨을 바라지도 않는다

더더욱 나는 나를 위해 순수를 아낄 요량도 없으니

끝없이 피어나는 구름의 운명에 나를 내맡겼으니

나 그대를 그리워하는 까닭은

홍방울새 되고 싶음이 아니라

홍방울새 울음소리 되고 싶음이니

갈증난 내 손바닥이 닿는 그대 먼 고장의 눈물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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