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4개의 꼬임을 위하여 - 정일근

마루안 2018. 7. 1. 09:32



4개의 꼬임을 위하여 - 정일근



양변기


양변기는 나를 절망하게 하지
좋은 거름 싱싱한 채소에 감사하며
똥 앞에 무릎 꿇던 우리나라 사람들
드문드문 얽힌 뒷간 지붕 틈새로
비 오면 비에 젖고 눈 오면 눈을 맞고
밤에는 별을 보고 시심에도 젖어보던
고 기막혔던 이 땅의 마지막 풍류
이제는 하찮은 똥덩어리 앞에
무릎 꿇어서는 안돼 허리를 바로 펴고 앉아
하수구 정화조 싱크대 막힌 곳을 뚫습니다
쏴아 이것이 문화이다 저 홀로 신나는 물소리
양변기를 볼 때마다 편의를 짓뭉개는
나의 아메리카 콤플렉스
양변기에 앉아 모두다 문화인이 되시압



시인과 장군


하늘에는 별보다 시인이 우글거리는 우리나라
땅에는 시인보다 별들만 반짝이는 우리나라



하루살이 戀歌


우리에게 내일이 없어요
그저 살아있는 이 순간 모두
당신네 소유처럼 소중하기만 해요
영원히 사랑하리라
그 끔찍한 약속은 할 수 없어요
저녁 어스름 밀리는 논두렁 부근
짚단 태우는 연기와 더불어
제기랄 태어나면 뭘 해요
태어나는 그 순간이 시작이에요
윙윙거리는 그 시작이 끝이에요
부모도 형제도 족보도 없어요
공화국도 시인도 대통령도 몰라요
죄송해요 태어난 게 잘못이에요
그러나 영원히 사랑하리라
그 끔찍한 약속은 할 수 없어요



꽈배기


꽈배기를 만들며 슬픔을 생각한다 어디
꼬여져 슬픈 것이 꽈배기뿐이랴
민둥산 황토 깊숙이 누운 드렁칡도 얽혀
슬프고 똥간 오줌통에 잠긴 새끼줄도 설켜
슬프지만 대야동 산 일번지 백열전구 불빛 궁색한
산동네 병든 아내며 월사금이 밀려 등교하지 못한
어린 아들 모두 모여 경화 웅동 명지장으로 팔러 갈
꽈배기를 만들며 밀가루 설탕 눈물 한숨 할것없이
모두 얽히고 설키나니 밤을 지내는 화물차 소리에 놀라
한미합작 굳게 악수한 밀가루가 대수냐
지금 이 시간 남들 다 보는 달동네 연속극이 대수냐
손바닥 가득 퉤퉤 침이나 바르며 꽈배기를 꼬지만
꽈배기처럼 이리저리 꼬여지는 우리네 인생이
무엇인지 가슴 깊숙이 차오르는 알 수 없는 이 분노가
무엇인지 늦은 밤 꽈배기를 만들며
생각한다 이 땅의 더 큰 슬픔과 우리들의 눈물과



*정일근 시집, 바다가 보이는 교실, 창작사








완장과 여름 - 정일근
-월당 당숙모님의 운을 빌어      



참으로 숭한 여름이었제 그해 여름은
월당리 웃마실 아랫마실 할 것 없이
네 당숙이 차고 돌아온 붉은 완장으로
왼통 붉게 타올랐제 세상이 바뀌었다고
해방이니 인민이니 알지 못할 말들만
새벽 우물가로 분주히 흩어지드니
한몸의 한형제가 서로 나누어져
월당리 인민위원회로 변핸
윤진사댁 종가 재실 위로 붉은 기가 오르고
그해 여름은 유난히도 길고 무더워
어서어서 가을이 오기를 빌었제
참으로 숭한 이 여름이
높재 넘어오는 마파람에 떠나가
만평들 너른 들에 나락 익는 것이 보고 싶었제
한몸의 한형제가 등을 돌린 채
웬수처럼 시달리는 이 난리도 떠나가
우리가 늘 믿고 살아온 지리산 상상봉에
네 당숙이 차고 돌아온 붉은 완장이
가을 단풍으로 뚝뚝 지는 것을 보고 싶었제
참말로 참말로 보고 싶었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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