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우연의 완성 - 박소란

마루안 2018. 7. 1. 10:11



우연의 완성 - 박소란



종로3가역 1번 출구 계단에서 느닷없이
우리가 만난 일
당신은 골뱅이호프로 나는 서울극장으로 총총히 걸음을 옮기다
어, 안녕하세요, 어, 안녕, 인사를 건넨 일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잠시 잠깐
서로를 바라본 일


우리 둘 사이
구걸하는 노인이 낮은 음성으로 무어라 중얼거린 일
판타지의 한 장면 능통한 주문처럼
나란히 보조개를 맞춰 입은 어린 연인은 까르르 웃음을 터뜨리고
안녕을 말하며 손을 흔들며
우리가 멀어져간 일


낯선 숨결의 사람들 틈
한참을 종종거리다 괜스레 멈춰 뒤돌아본 일


당신은 왁자한 술자리로 나는 어둠 무성한 객석으로
자꾸만 가물대는 뒤통수를 비끄러맬 때
내가 당신을
당신이 나를 애써 부르지 않고 아득한 길 위에 놓아준 일


그로부터 나는
제일만물 희부연 창가에서 종로지구대 담벼락에서
주름으로 얽히고설킨 탑골공원 구석구석에서 알은 체
당신을 알은체하느라 쉴 새 없이 두 눈을 깜짝거리고 그로부터
내내 만지작거리던 우연을 가방 속에서 펼쳐 든 당신이 활짝
인사를 건네는 일


안녕, 난생처음
깡통을 뚫고 나온 골뱅이처럼 영원히 엔딩에 닿지 않는
한편의 영화처럼
서로가 서로를 향해 걸어가는 일



*시집, 심장에 가까운 말, 창비








노인 - 박소란



집 앞 담벼락에 비스듬히 기대앉은 밥상
칠이 벗겨진 흉곽 위로 굵은 빗방울 떨어진다
달그락대는 비의 수저 소리에 나는 괜스레 목구멍이 따끔거리고
채 삼키지 못한 저녁이라도 있는 건지


한평생 밥만 먹다
고스란히 세월을 물린 고집 센 노인네처럼
뒤늦게 병상에서
더는 먹고 싶은 것도 없으니, 군기침하며 돌아눕는 뒤통수처럼


밥상은
언제 벌써 이가 몽창 빠진 채로 쓰게 웃고


주린 낯으로 종종거리며 곁을 지나는 내게
부러 더 세게 힘을 주어 뱃가죽을 틀어쥐는 나약한 손에게
신수를 훤히 꿰뚫어 고개를 주억거리는 백수(白首)의 점쟁이처럼


밥상은 말한다 낮고 너른 음성으로
흠씬 젖은 걸음을 붙든다


그만 이리 와 한술 뜨시게
그래 봐야 결국엔 모두 낡고 만다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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