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밤중에 자다가 깨는 것은 - 박미란
빈손으로 가던 적막이,
내 몸 친친 감고
은하의 깊은 골짜기로 흐르기 때문이다
검고 긴 머릿단 치렁치렁 끌고 가던
적막이,
하얗게 세어버린 은발로
내 방문 앞에 우두커니 서 있기 때문이다
한밤중에 깨어 다시 잠들지 못하는 것은
누가 내 이름 불러서가 아니라
한 번도 잠든 적 없던
밤이,
적막의 이름을 목이 쉬도록 부르기 때문이다
*시집, 그때는 아무것도 몰랐다, 문학의전당
비단길 - 박미란
밤은 그냥 가지 않고
기억을 품고 가려 한다
무엇 때문에 어둠에서 새벽이 태어나고
무엇이 이 공간으로 밀려오는가
매일 밤이면서 새벽이고
낮이면서 저녁인 시간들
무엇 때문에 하루는 또 하루를 물고 가는가*
죽은 별이 살아나 눈썹 위에 비틀리는가
무엇 때문에 죽은 별이 다시 죽어
입술은 루주를 덧칠하고
핏기 없는 얼굴은 화장을 떡칠하는가
모든 밤이 서럽지 않으면서 서러운
화려하고 쓸쓸한 잔칫날인데
흰 천에 형형색색 실을 놓아
끝없는 밤으로 이어놓는가
새벽을 푸르게, 뼈마디 쑤시도록 푸르게 하는가
무엇 때문에
밤과 새벽이 멀리 떨어진 듯 이어져
또 하루가 무단결근 없이 이리도 밝아오는가
*파블로 네루다의 시 <어디냐고 묻는다면>에서 변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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