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사랑, 때 묻은 껌 - 김이하

마루안 2018. 6. 26. 21:07

 

 

사랑, 때 묻은 껌 - 김이하

 

 

사랑, 한다고 말한다

웅웅거리며 사랑을 끌고 가는 전선들

웅웅웅웅 울었겠다

너무나 공허하므로

지구 그림자에 갇힌 달처럼

나도 어찌할 수 없으므로

 

나도, 사랑한다고 달려온다

웅웅거리며 사랑을 끌고 온 수화기에

이슬 맺힌다

메마른 입술로는 더 이상

사랑을 씹을 수 없으므로

 

그러나 이 슬픔이

눅눅한 사랑의 슬픔이

왜 이리 가슴에 갇혀 있나

갇혀서는 겨우 그대에게까지만 갔다가

기진맥진 돌아오는 사랑은

언젠가는 돌아오지 않을

이 몹쓸 사랑은

 

그래도 입안을 맴돈다

쓸쓸한가, 하면 달콤하게

내 생의 한켠을 채우고

화한 입안에

사랑을 다시 씹는다

 

사랑은 오래 전

벽에 붙여 둔 때 묻은

껌이다

 

 

*시집, <춘정, 火>, 바보새

 

 

 

 

 

 

그 여름 - 김이하


분꽃은 피었겠다
들창 아래, 여인숙 회벽에 기대어
낮게 울음 울던 지난 밤 여인처럼
아침에도 한 여자가 지나가고
나는 무심코 햇살 속에 던져진
그녀의 그림자를 보았을 뿐
언제 올 건가, 너는
어릴 적 할머니 품에서 들었던 누이 소식은
진달래 피던 봄 그 돌무더기 아래
눌러 죽이고 어느덧 여름인데
무섭던 맘이 장대비로 내리다 구름이다
눈물 그렁한 웃음이다 그런 여름인데
분꽃들 피었다, 누이 얘기는 남아
천사가 되었다던 누이는 볼 일 없고
여인숙 들창 아래 피었던 분꽃이
하루고 열흘이고 떠나지 않으면
맘엔 언제나 오지 않던 네가
꽉 차 있던 거다, 언제 올 건가
혼자 죽고 싶도록 내 안에 그렁한 너는
분꽃처럼만 피었다가 갈 순 없나
한낮에 암말 없이 선 그 꽃처럼

 

 

 

 

 

*시인의 말

 

*스스로 쓰다

 

두 번째 시집 <타박타박>을 낸 지 10년이 지나서 세 번째 시집을 낸다.

어설픈 시는 한 뼘이나 자랐을지 말지 하는 동안 내가 건너 온 풍상은 꿈을 한 길은 더 깊이 쑤셔 박은 것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이 모자란 것을 누가 보아줄까 오금이 저린다.

그래도 이렇게 밀고 나가야 한다면 부끄러움도 무릅써야 하는 것 아닌가, 삶이란 멍에가 그렇듯이,

무엇보다 어린 시절, 일곱 남매가 부대끼던 그 시절이 사무친다. 더 오래된 기억 속에서는 삵이 닭의장을 기웃거리는 한겨울 할머니 등에 업혀 있던 한 풍경도 겹치는 이즈음이다.

얼마 전 아버님의 제사에 모인 삼형제는 이제 팔순에 가까운 노모에 대한 회한과 걱정을 몇 마디 나눴다. 아버지가 가신 푸른 보리밭으로부터 우리는 지금 몇 걸음이나 걸어왔을까? 아쉬움은 늘 그 푸른 보리밭으로 되돌아가곤 한다. 어버지의 나이를 훌쩍 뛰어넘었어도 여전히 나는 어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