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잃어버린 명함 - 윤병무

마루안 2018. 6. 22. 20:51



잃어버린 명함 - 윤병무



시계의 날짜는 내일로 들어섰는데 나의
하루는 끝나지 않았다
막차에 올라 집으로 돌아오는 길
어느새 목련은 피었건만
나는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
빛과 어둠만이 스쳐 지나가는
차창 밖 나의 시야는
막 지워진 칠판 같다
빈 교실의 분필 가루 같은 귀갓길
외우고 있는 전화번호부를 뒤적여보아도
모두 일로 만난 사람들의 것
어느새 나는 그렇게 살고 있다
마주 오는 자동차에서 쏘아대는 쌍라이트처럼
떠오른 전화번호 하나
한때 화투 용어로 외웠던 번호
어느 쓸쓸한 날처럼 차창 밖으로
취객이 스쳐 지나간다


나는 어젯밤
버스 안에서 나의 이름이 인쇄된
명함 한 장을 꺼내 뒷면에
무어라고 썼던가



*시집, 5분의 추억, 문학과지성








찰나의 화석 - 윤병무



나는 몰랐다
그때의 기타 소리가 십일 년이 지나서
꽃 한 잎을 떨어뜨리며
현기증처럼 흔들리는 봄바람 같은
공명(共鳴)으로 다가 올 줄이야


세상의 바깥엔 빛이 있었고
그 중심의 자리엔 갑작스런 정전 같은
귓전의 쇳소리가 있었다
그러나 나는 더 이상 그 노래를 기억하지 못한다
한 사람의 응시는 나를 뚫고
푸른곰핑이가 핀 벽지 위에
나의 안면을 판박이하였다.
나는 판박이의 얼굴을 손톱으로 긁었다
다 자란 손톱 사이로 피고들어
때 낀 그날은 오래도록 빠지지 않았다


추억이란 마모되면
수만 년이 지난 어느 날의 또 다른 이름,
어느 어두운 방의 방사선이 들여다보이는 찰나의 화석
그때에도 누군가 쓸쓸한 웃음을 지을까?
어쩌랴 그날은 지나갔다
이름을 갖지 못한 행성이 먼 훗날,
우주를 한바퀴 돌아오는 날을 기다리든지 아니면
지구가 궤도를 이탈해 그 시간의 이름표를 찾아가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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