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폐가 - 송종규

마루안 2018. 6. 22. 20:36



폐가 - 송종규



내간 비운 몇 년 동안 거미들은 내 집에
간소한 세간을 들여놨다
비워 둔 시간 또한 촘촘하게
그물에 가둬 놨다
길을 잘못 든 날파리와 시큼했던 시간들, 콩콩거리며 뛰어다니던
아이들의 발자국 소리
창문으로 기웃거리던 별빛과 바람의 갈기, 모두


우주에서는 길고 긴 개기월식이 있었다 하자, 아니면
내가 도무지 내 집을
찾지 못했다 하자, 그렇다 한들
얼기설기 내 몸까지 진을 친 거미줄 같은 세월
칭칭 동여맨 쑥대밭 같은 기억의 숲들


창을 열고 커튼도 걷고 몸 곳곳에 진 친 거미줄을 털어낸다
비명도 없이 자욱해지는 긴 복도 끝, 온통
부서진 말의 부스러기와 모래 가루의 기억들


거미는 다시 내 안에 세간을 들여놓을 것이다 아비며 어린 새끼며 집요한
탐욕의 본능까지, 호시탐탐 튼튼한 집을 세워 올릴 것이다
목화솜 같은 실을 뽑아 조개구름 같은 문패도 내걸 것이다
어쩌면, 나는, 다시, 내 집으로 돌아오지 못할 것이다


아무래도 나는, 나에게는 불편한 옷



*시집, 공중을 들어 올리는 하나의 방식, 민음사








분홍 - 송종규



저 작은 꽃잎 한 장에 천 개의 분홍을 풀어놓은 제비꽃, 저것을 절망으로 건너가는 한 개의 발자국이라 한다면


아침부터 저녁까지 허물어지는 빛들과, 소용돌이치는 바다를 또 누구의 무덤이라 한다면


바이올린과 기타와 회중시계가 들어 있는, 호루라기와 손풍금과 아쟁이 들어 있는 액자 속을 고요라 한다면
층계마다 엎드린 저 납작한 소리들을 또 불운한 누구의 손바닥이라 한다면


하루 종일 꽃잎 곁에서 저물어도 좋겠네 절망절망 건너는 발자국마다 분홍 즙 자욱한 삶의 안쪽
손바닥으로 기어서 건너가도 좋겠네


세상은 슬픔으로 물들겠지만 꽃잎은 이내 짓무르겠지만 새의 작은 가슴은 가쁜 호흡으로 터질지 모르지만


슬픔으로 물들지 않고 닿을 수 있는 해안은 없었네 짓무르지 않고 건널 수 있는 세월은 없었네


눈부신 분홍, 한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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