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박하와 나프탈렌 - 조원

마루안 2018. 6. 22. 20:00



박하와 나프탈렌 - 조원



창밖으로 쏴 하게 비가 내리고 한철 입었던 블라우스를 개비며
서랍 안쪽에 놓인 백옥의 나프탈렌을 만져보았다


봄비가 우아하게 땅을 녹여 먹듯 독약 처분이 내려진 사랑을
아무렇지 않게 녹여 먹고 싶었다 결코 박하가 될 수 없는 눈부신 독소들
그만 혀끝에 인광이 맺히고 말아,


쓸쓸한 사랑의 모형을
돌 틈에 끼인 가자미눈으로 쳐다보는데
첫사랑 박하 향은 옷장에 머무를 수 없고
투명한 표정의 그림자만 서랍에 누워 맹독의 눈물을 흘렸다


꽃의 조형만으론 입안을 달콤하게 채울 수 없나,
두 볼 가득 깨문 채 잠들어도
도무지 무해한 꿈결 같은 혼돈의 결정체 아래,
순한 눈동자와 냉혹한 입술이 덧칠되었다


박하와 나프탈렌 사이 끝없이 비는 내리고
눈물은 혀끝에 엎어져 내내 입술을 달싹거렸다



*시집, 슬픈 레미콘, 푸른사상








벌, 돌아오다 - 조원



화분의 꽃대는 늙어갔다. 꽃을 피워 무는 일
귀찮아졌다 몇 개의 수술은 빠져나가고 날마다 잎에서는
가래 끓는 소리 났다 집 떠난 당신이 돌아올 때면
늘어진 꽃술 세우고 촉촉이 입술 닦던, 꽃
그마저 시들해져 건초만 넋 놓고 바라보았다
봄은 한 시절, 열정적인 키스는 그때뿐이었다
당신이 후려치고 들녘으로 날아간 뒤
화단을 홀로 지켜야 하는 그 오랜 풍경이 고단했던 것이다
질긴 투병의 암환자처럼 빛의 수혈을 받아도
인생은 퍼석하였다 벌에 쏘여 퉁퉁 부어오른
계절이여 뿌리 사이로 죽은 독설이 기어 다녔다
대문간에 소금 뿌릴 기력조차 없는데, 날개 접고 온 당신
천지 없이 쏘다닌 혀끝에는 바람의 흔적만 묻어 있었다
햇살이 위안 삼아 전해주는 알약 털어 넣고
조금씩 흔들리며 살았다는 신산한 내력
정녕 버리는 일조차 귀찮아졌을 때 당신을 떠안았다
혼신의 키스에도 꽃잎은 젖지 않았다





# 조원 시인은 1968년 경남 창녕 출생으로 미술대학 서양학과를 졸업했다. 2009년 부산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되어 문단에 나왔다. <슬픈 레미콘>이 첫 시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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