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춘천, 그 흐린 물빛의 날 - 강윤후

마루안 2018. 6. 22. 19:26



춘천, 그 흐린 물빛의 날 - 강윤후



수재민처럼 우리는 물가에 서 있었다
체온계를 입에 문 듯 아무도
간밤의 폭우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았다
한눈 팔며 날으는 물새 두어 마리
침묵을 쓸어모아 강기슭에 부려놓고
덜 부른 노래와 남긴 술도 아쉬움은 아니어사
얼빠져 머뭇대는 성깃 빗발에
새삼 나부끼는 몇 낱의 웃음
섣불리 우산 펼치지 못하고 모두들
시든 해바라기 대궁처럼 우주커니 젖어야 했다
생각난 듯 누군가 물수제비를 떴다
둥둥 걷은 바짓단에 굳은 장딴지로
성큼성큼 물 위를 뛰어가던 돌은
실족하여 영영 강을 건너지 못하고
그것을 핑계로 우리는 일제히 고함을 지르며
낄낄거리며 돌팔매질을 했지만
쓸쓸한 지랄발광
벌써 세월에 골병이 들어 아무도
강 건너의 삶과 강에 그림자를 누인 산의 깊이를
가늠하려 하지 않았다
최초의 흐름을 기억하는 물결은 어디에 있는가
길 잃은 물결도 바다에 가는가
하룻밤 이틀낮의 성냥불 같은 旅程을 빌미 삼아
강은 몇 가닥 사소한 물주름만으로도 쉽사리
우리의 등을 떠밀어 멀어지고
서울이 아니어서 한 무리로 묶인 우리는
기차놀이처럼 열을 지어 낯선 거리를 걸었다, 여전히
구구단을 외듯 비는 내리고
물가에 신발 한 켤래 벗어두고 돌아서지 않아서 서른 살
턱 밑 어둠으로 차오르는 지
異邦의 기다림들 흥건히 춘천역 대합실에서
서먹하게 담배불을 나누며 우리는
빨리 길드는 이치와 천천히 식는 방법을 생각했지만
다시 굵어진 빗줄기들 피난민처럼
역 광장에 빽빽이 몰려들어 질러대는 아우성이
조금은 피곤하여 젖은 옷 젖은 대로 모두들
말이 없었다, 제풀에 무거워진 담배 연기만
발들에 차곡차곡 쌓일 따름이었다
열차 시간이 되어 우르르 승강장으로 몰려나갈 땐
우리가 떠나면 춘천이 끝내 물에 잠기리라
어깨를 까불대며 장담하기도 했지만



*시집, 다시 쓸쓸한 날에, 문학과지성








서울 - 강윤후



나이를 먹는 건
돌아갈 수 없는 강을 건너는 것
열차가 한강을 건너고 있다
변기에서 물이 빠져나가듯
스무 살이 수월하게 멀어진다
나는 휴대용 녹음기의 테이프를 갈아끼우고
한껏 볼륨을 올린다
리시버는 내 귀에 깊고
서늘한 동굴을 낸다
새떼가 우르르 시간을 거슬러 날아가고
철제 계단을 울리며
지하로 내려가는 구둣발 소리
아우성처럼 쏟아지는 오색종이를 맞으며
살아갈 날들이
완전군장을 한 채 진군해온다


열차가 서울역에 닿으면
서른 살이 매춘부처럼 호객하며
나를 따라붙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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