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뒷날 알게 되는 것 - 조항록

마루안 2018. 6. 21. 22:30



뒷날 알게 되는 것 - 조항록



내 또래 사내가 늙은 어미의 손을 잡고
석양 속을 걸어간다
서럽게 느린 두 개의 점
이승의 꼬투리가 툭 하고 내던진 까만 콩알들이
질긴 인연으로 서로를 만진다
내용물을 다 게워내고
빈 깡통처럼 발길에 채였을 것 같은 사내 곁에
악천후에 출렁거리다
온전한 접시 하나 남지 않게 깨지고 부서졌을 어미가
서로의 모습을 눈동자에 새긴다
성긴 심장을 포갠다


어처구니없게
그동안 말이 너무 많았다
그토록 소중히 여겨온 것들을 잃어버렸으나
달라진 것은 별로 없다
진작 잃어버렸어도 괜찮았을 것이다



*시집, 여기 아닌 곳, 푸른사상








이게 뭐라고 - 조항록



믿기 어렵겠지만, 삼십 년째 해마다 꺼내 입는 추리닝이 있습니다. 식구 말고 누가 볼 일도 없으니 집 안에서 맘 편히 몸 편히 하루에도 몇 번씩 입었다 벗었다 하는 추리닝이 있습니다. 아랫도리는 진작 밖으로 내쳐지고 윗도리만 남아 골동품 흉내를 내는 낡은 옷, 형이하학과 형이상학의 비유는 떠올리지 마시기 바랍니다. 왠지 벗어두고 보면 내용 없는 허물같이 적적한 옷, 소매가 후줄근하게 늘어나 유쾌한 긴장감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고, 옷깃에는 기억의 묵은 때가 번질거리는 옷, 모쪼록 그렇고 그런 회한과 사라져버린 걱정 따위는 떠올리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저 좋은 날 다 지나가버린 빛바랜 추리닝을 버리지 봇할 따름입니다. 그래요, 그렇습니다, 서른 번의 겨울이 지나는 동안 나의 체온을 샅샅이 목격한 추리닝이 있습니다. 미끈하게 트레이닝복 운운하기는 머쓱한 옷, 상표는 일찌감치 폐업해 시장바닥 짝퉁으로나 연명하는 옷, 분명 버리지 못하는 것이 나의 습성은 아닌데, 꿈도 버리고 인정도 버리고 어머니까지 하얗게 태워버리고도 꿋꿋이 잘 살아가는데, 어쩌다 아까울 것 없는 옷 하나를 내다버리지 못하는지요. 삼십 년째 그깟 문턱을 못 넘어 이럴 수도 저럴 수도 없다며 망설이기만 하는지요. 어쨌든 한 생이 주저앉는 데 이런 옷 두 장이면 충분하겠구나 생각하며, 또다시 올 겨울이 마지막이라고 작심하지만, 글쎄요.






# 내게도 버리지 못하는 게 있다. 삼십 년은 아니지만 이십 년은 훨씬 넘은 가방과 지갑이다. 가방은 빛깔이 많이 바랬고 지갑은 귀퉁이가 닳고 해졌어도 여전히 현역으로 활동하고 있다. 내가 유행에 별 반응을 하지 않는 성격인데다 정이 든 물건은 닳아질 때까지 쓰는 편이다. 하물며 쉽게 버리지 못할 사연이 담긴 물건은 더욱 오래 함께 하고 싶다. 그들과는 몇 년은 충분히 더 함께 할 수 있을 것이다. 좋은 시는 이렇게 소소한 일상과 연결이 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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