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예민한 악기 - 박헌호

마루안 2018. 6. 21. 22:16



예민한 악기 - 박헌호



예민한 악기가 있다, 어깨를 움츠린 채
집으로 돌아오는 저녁이거나 다리를
건너가는 아침이거나 신발을 고쳐 신는 한낮이거나
그것은 어김없이 운다, 체 게바라는 체 게바라
로맹가리는 로맹가리 빈 항아리처럼 울다가
한숨을 토한다, 바뀌기를 기다리는 붉은 신호등 앞에서나
굳게 잠긴 문고리 앞, 차곡차곡 쌓인 두꺼운 역사책
정오만 되면 다리가 올라가는 영도다리 밑의 점집에서
로맹가리는 로맹가리, 체 게바라는
체 게바라 찌그러진 놋사발처럼, 우그러진 붉은 못처럼
운다, 찢어진 북 둥둥 퀙퀙 소리치지 못할 때
저린 팔목을 허공에 들었다 놓을 때, 어깨가 무거울 때,
체 게바라는 로맹가리 로맹가리는 체 게바라
예민한 악기가 우는 동안, 문화는
시체였다, 정치는 뚜껑 없는
재떨이였다, 신문은 재떨이 덮개로
적당했다, 뚱뚱한 세상의 집들은
무겁게 침묵하며 세월을 마구 쑤셔 넣었다
로맹가리는 로맹가리, 그것은
부동자세로 서 있는 시간의 모서리
체 게바라는 체 게바라, 그것은
복사할 수도 새로 바꿀 수도 없는 열쇠
로맹가리는 로맹가리 체 게바라는 체 게바라
예미한 악기가 울고 있다
지금



*시집, 내 가방 속 동물원, 문학의전당








상상, 오래된 - 박헌호



냉장고는 빵을 만들지 못했다
벽시계는 문을 내지 못했다, 아버지
청춘의 붉은 아버지는 텃밭 가득
푸르고 푸른 리비도를 심었으나
매양 열리는 것은 녹슨 한 묶음의 분노였다
냉장고는 더 이상 얼음을 만들지 못했다
벽시계는 태엽이 늘어나 골동품이 되었다
늙은 아버지 잠긴 대문 안에서
녹슨 꽹과리 소리로 진열되었다
돌아보지 마라, 골동품의 거리에서 나는
더 이상 가지 않는 생의 시계를 보았으니
하루의 저물녘은 더디었지만
세월은 빨랐다
세월을 빨랐으나
냉장고는 빵을 만들지 못했다
소리도 냄새도 없이 가버린 시간
무섭다





# 박헌호 시인은 1962년 부산 출생으로 동아대 국문과를 졸업했다. 1989년 <동서문학> 신인상을 수상하며 등단했다. <내 가방 속 동물원>은 등단 이후 26년 만에 낸 첫 시집이다. 2001년 <작가세계>에 중편소설 <유리를 끼우다>가 박승하라는 필명으로 당선되어 소설가로도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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