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자존 - 김언

마루안 2018. 6. 20. 20:48



자존 - 김언



마음 하나 뗐는데 말이 멋있다. 술을 따른다.
멋있지 않아도 좋으니까 이걸 좀 세워달라. 술잔은 많다.
변명도 많고 내가 말하고자 하는 요지는 어느 술자리에서든 마찬가지
꼬리를 남기고 사라진다. 마음이 사라진다고 편안해질까?
몸이 사라진다고 정말 어두워질까? 나는 사라진 적이 없는
사람의 말을 믿고 따르고 의심하고 행동하고 자제하고
두둔해본 적이 없는 사람의 말을 믿을 수 없다.
당신은 술을 따른다. 마음 하나 뗐는데


모두가 개인으로 돌아오고 있다. 한 사람씩 무기력하게 짖는다.
개가 없어도 괴롭다. 마음이 없어도
여러 동물들이 짖는다. 감정도 없이
나는 내 출생지에서 빠져나오지 못했다.
그걸 고향이라고 부를까 나라고 부를까
아니면 부들부들 떨고 있는 이 바깥의 짐승들에게
이거라도 세워달라고 몸 대신 일으키는 그것을 뭐라고 부를까?
나는 부른다. 어서 와서 앉으라고
벌써 일어나고 없는 그에게.



*김언 시집, 한 문장, 문학과지성








불변 - 김언



2 더하기 2는 이미 4였다. 나는 이미 황인종이었고 아버지는 아직 죽어 있다.


가장 무거운 말도 할 수 없는 나는 줄곧 침대에서 일어나고 있다.
다행히 아직도 떠나지 않은 그가 있었다.
그때 붙잡았더라면


내가 아직 이렇게 살고 있지는 않을 텐데
벌써 4였다. 나는 이미 어린아이였다. 그 침대가 이미 새것이듯이


아직도 떠나지 않은 그가 갑자기 종로 쪽으로 걷고 있었다.
저쪽 뺨을 맞으러 간다고 했다.






# 김언 시인은 1973년 부산 출생으로 1998년 <시와사상>으로 문단에 나왔다. 시집으로 <숨쉬는 무덤>, <거인>, <소설을 쓰자>, <모두가 움직인다>, <한 문장>, <너의 알다가도 모를 마음> 등 여섯 권을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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