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불국사로 가기까지 - 정일남

마루안 2018. 6. 20. 20:01



불국사로 가기까지 - 정일남



초행이며 혼자 가는 길에서는 질문이 많아진다
물어본 것, 다시 물어보는 조바심도 있다
처음 오는 길이니 모든 것이
신생의 낱낱이 되는 법
나는 벌써 며칠을, 백제의 몇백 리를 거쳐
낮달 데리고 여기 당도했다
이 길이 동방의 빛 찾아가는 탄식이 되려면
몸가짐을 어떻게 해야 하나
또 무얼 갖고 가야 하는 건지
연우가 가뭇 깔려 앞을 가로막고 있다
무섬증조차 발바닥에 비친다
이 길 곧장 가면 불국사가 있습니까
불국에 가야 불국사를 만날 겁니다
젊은 화랑이 지나가며 답한다
불국이라, 불란서를 거쳐야 된다는 말인가
蘭의 향이 가득한 서쪽을 거쳐야
동방의 입구가 보인다는 뜻이다
그러고 보니 불란서 사람도 보이고
브라질 사람도 보인다
슬프고도 부은 같은 고요
몇천 년을 놓쳐버린 지금에야 찾아오는 법이
어디 있느냐고, 누가 나를 탓한다
죽은 사람은 다 불국에 가 있을 것이다
나의 어머니도 나의 망실도.



*시집, 기차가 해변으로 간다, 신원문화사








언덕을 넘으면 - 정일남



길이 연우에 젖는다
나는 생존을 가볍게 생각했으므로
슬픔을 체계적으로 배우지 못했다
기쁨에 약한 나는 슬픔에 강한 편이지만
막연한 여수에 시달림을 받았다
슬픔을 정중히 맞을 줄 알았던들
신이 준 체념의 불빛을 놓쳐버리진 않았을 것이다
슬픔이 죽음에 다다르면
마음은 깊은 물속의 고요처럼
수련에 기대게 된다
연우에 젖은 언덕은 몸 벗어난 넋이 어른거린다
죽음이 어떤 이상한 꽃으로
되돌아온다는 설은 환상적이지만
삶을 괴롭히는 작용을 부추긴다
언덕을 넘기란 어렵지 않으나
화현리 언덕길은 꽃이 괴로움을 움켜쥐고 날 기다리는 곳
삶이 꺾인 그가 적막에 든 채 날 기다린다
언덕 너머에 나의 길카리는 없다
새코찌리 둔덕은 옛 슬픔과 헤어질 수 없다.





# 20년 전 시집을 뒤적인다. 시를 읽다 이렇게 유통기한이 긴 시가 있음을 알았다. 앞으로도 오래 갈 것이다.




'한줄 詩' 카테고리의 다른 글

자존 - 김언  (0) 2018.06.20
사랑은 구름의 일 - 박남희  (0) 2018.06.20
있지 - 이창숙  (0) 2018.06.20
삼천포에 가면 - 최서림  (0) 2018.06.19
야매 미장원에서 - 조연희  (0) 2018.06.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