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장미의 손길 - 김승강

마루안 2018. 6. 18. 19:59



장미의 손길 - 김승강



술집에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 위에 공중화장실은 없다.
맥주를 마신 날은 준비를 단단히 하고 귀갓길에 나서도
중간에 길 위에서 '실례'를 하는 날이 있다.
따라서 내 단골 술집과 내 집 사이 집들의 담장 안 또는 담장 위에 핀 꽃들은
내 '물건'을 기억할 것이다.
나는 꽃들의 꽃잎 속에 내 물건의 역사가 잘 기록되어 있으리라 믿는다.
매화가, 동백이, 목련이, 개나리가, 모란이, 장미가, 능소화가
내 물건의 퇴화와 그것이 쏟아내는 폭포수의 쇠락을 목도하면서
피고 지고 다시 피었다.
그 꽃들 중에 유독 내 물건에 관시을 보인 꽃은 장미였다:
한번은 봉고차 뒤에서 급히 볼일을 보고 바지춤을 올리는데
누가 내 손을 덥석 잡는 게 아닌가!
장미가 가시투성이 팔을 한껏 담장 아래로 뻗어
내 물건을 움켜쥐려고 하고 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그때 장미는
내 물건에 무슨 흑심이 있어서 그랬던 것은 아니었다.
그날 내가 유독 비틀거리고 오줌 줄기가 힘이 없었을 것이다.
그게 그는 안타까웠던 게다.
그때 나는 한참 동안 장미의 손길을 가만히 놓아두었다.



*시집, 기타 치는 노인처럼, 문예중앙








능소화 - 김승강



저 꽃은 지는 게 아니다.


절정의 순간에 추호도 미련 없이 손을 놓아버리는
저 벼랑 위의 긴 행렬
뒤따르는 꽃이 앞선 꽃을 벼랑 아래로 밀어주는
삼천궁녀의 일사분란한 투신


앞선 주검이 뒤따르는 죽음을 받아주고 있다.


담장 코너에 설치된 시시티브이는
저 주검들이 집주인의 손을 빌려 고용한 사진사:
사진사의 카메라 앞에
죽음으로 펼쳐 보이는 황홀한 성(性)


내 눈동자의 망막 속으로 소지(燒紙)처럼 붉은 새떼가 날아갔다.





# 김승강 시인은 1959년 경남 창원 출생으로 경성대 중문과와 경상대 대학원 중문과 석사과정을 졸업했다. 2003년 <문학 판>으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흑백 다방>, <기타 치는 노인처럼>, <어깨 위의 슬픔>, <봄날의 라디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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