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총중호인(塚中呼人) - 고운기

마루안 2018. 6. 18. 19:35



총중호인(塚中呼人)* - 고운기
-삼국유사에서 5



망덕사 승려 선율(善律)이 저승에 불려 갔다.
육백반야경(六百般若經)을 만들던 참이었다.
-네 수명은 비록 다 되었다만, 이루지 못한 것이 있으므로 다시 세상으로 보내 주노라.
저승지기 참 착하기도 하지.


돌아오는 길인데, 한 여자가 나타나 서럽게 울며 말했다.
-우리 부모가 금강사의 논을 몰래 가로챈 데 걸려, 저승에 잡혀 와 오래도록 고통 받고 있습니다. 이제 고향에 돌아가시거든 빨리 돌려주라 하소서.
선율 스님 참 바쁘기도 하지.


어쨌건 즉은 지 열흘이 지나 돌아온 무덤에서
나 살았다
사흘간 외친 선율
여자의 집을 찾아가 소원 들어주었는데


비 오는 밤 택시에서 내린 여자는 멀리 불 밝힌 집을 가리키며
-차비는 저기 가서 받으세요.
서울 사람은 거기가 망우리 공동묘지라 하고
우리 어머니 같은 고흥 사람은 벌교 넘어오는 뱀골재 공동묘지라 하고



*무덤 속에서 사람을 부르다
**시집, 어쩌다 침착하게 예쁜 한국어, 문학수첩








득주지우(得珠之憂)* - 고운기
-삼국유사에서 2



어린 스님 한 사람이 샘 가에서 바리때를 씻다가
자라에게 남은 음식을 주며 놀았다.


-내가 너에게 덕을 베푼 지 여러 날인데 무엇으로 갚아 주겠니?


며칠이 지나, 자라가 작을 구슬 하나를 뱉어 냈다. 어린 스님은 그 구슬을 허리띠 끝에 달고 다녔다. 그로부터 사람마다 아껴 주었다.


서울역 앞 1970년대 장사 잘되던 목욕탕에 고용된 이발사 김 씨
주인 아들이 치과 대학 졸얼할 때까지 십 년 넘게 머리 깎아 주었다.


-내가 나중 늙거든 내 이빨은 네가 맡아 주겠니?


삼십 년이 지나, 아들은 강남에서 돈 많이 번 의사가 되었다. 이미 아주 부자인 동기생 아가씨와 결혼하고 차린 병원은 예약 없이 못 갔다. 김 씨는 한 번도 가지 않았다. 


누구나 지녔으면서 귀한 줄 모르는 구슬 하나쯤 있다는 근심스러운 이야기.



*보물을 가진 자의 근심





# 고운기 시인은 삼국유사를 연구한 학자이자 대학 교수이기도 하다. 학창 시절 국어 선생님의 삼국유사 강의를 열심히 들었다. 역사와 국어 시간을 유난히 좋아했던 터라 국어 선생의 수업은 내 눈을 더욱 빛나게 했다. 이 시를 읽다 보면 삼국유사에 대한 시인의 해박한 지식에 감탄한다. 시 한 편에 주제 자명한 단편 영화 하나씩 들어있다 해도 되겠다. 시 읽는 맛이 참 쫄깃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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