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그는 왼쪽으로 돌아눕지 못한다 - 최정

마루안 2018. 6. 16. 22:38

 

 

그는 왼쪽으로 돌아눕지 못한다 - 최정

-아버지

 

그는 머슴이었다

맨몸으로 농사지어 땅 마련한 억척스런 사내였다

다락방에 몰래 숨어 있다 끌려간 그였지만

사단 전멸당하고 기적처럼 목숨 건진 그였지만

6.25 아침 밥상마다

한밤중 마신 물이 알고 보니 사람 피였다는 둥

인민군들이 까맣게 몰려 왔다는 둥

그날의 전투 전설처럼 들려주었다

그리고는 며칠 말이 없었다

 

그에게는 비밀이 하나 있다

마을처녀 남몰래 좋아하던 그의 형님

인민군 무상몰수 부상분배 반가워하다 빨갱이로 몰려 총살당했다

그는 자식들 앞에서 허허 웃으면서

왼쪽 머리통에 총알이 하나 거꾸로 박혀 있어

왼쪽으로 돌아눕지 못한다고 했다

그의 일부가 된 머리통의 총알처럼

형님 비명 쇳덩이처럼 박혀 있는 것을 모른다는 듯 허허 웃으면서

 

 

*시집, 내 피는 불순하다, 도서출판 우리글

 

 

 

 

 

 

젊은 아버지 - 최정

 

 

나는 늘 젊은 아버지가 그리웠다

 

제일 먼저 일어나

커다란 지게 지고 대문 나섰다는

젊은 아버지 뒷모습이 궁금했다

황소 같은 입김 새벽 공기에 반짝이는

젊은 아버지를 상상하며 어른이 되었다

 

스무 살,

중환자실로 실려 온 아버지

초라하게 늘어진 성기(性器) 처음 본

스무 살,

로맨틱한 사랑에 빠지기도 전에

사랑의 환상마저 빼앗긴

그 어느 날

 

나는 늘 젊은 아버지가 그리웠다

 

정말 피하고 싶었던 일

팔순의 아버지에게 소변통 받혀주다

다시 마주친,

그 작고 늙은 성기가 가여워서

부끄러움 잊은 그 작은 성기가 슬퍼서

고개 돌리고야 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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