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죄책감 - 박성준

마루안 2018. 6. 15. 22:59



죄책감 - 박성준



유월에 시월이 아픈 사람을 만났다
죽은 나비처럼 두 귀는 유독 지쳐 있었고
쳐진 눈에는 매듭 몇 개가 풀려 있는 모습이었다
그럴 만도 했다 근육보다
신경이 큰 승모근의 기울어진 각도는 제 숨은 뿌리를 적발해내기 충분했고
푸른 손으로 얼굴을 문지를 때마다
낯빛에서 풀밭이 두껍고 잦게도 풀려나왔다
저마다 소리를 물고 있는 꽃들이 저마다의 사연에 익어
절벽만큼 안개로 지고, 말을 할 줄 모르는 혀는
말을 배우기 위해 저 혼자 병에 걸려야 했다
고향이 어디라 했던가
태생을 모르더라도 그보다 오래 살았을 육지
꼭 자물쇠 같았다 서로 우회할 수 있었다면 만나지 말아야 할 저녁이 있었다
온몸으로 헤어지고 있었다
약도 쓸 수 없는 나의 미래가 여전히 부끄러웠다



*시집, 잘 모르는 사이, 문학과지성








왜 그것만을 요구하지 못했을까 - 박성준



말이 필요한 날이면, 울어줄 사람이 없었다 이불을 깊숙이 뒤집어쓰면 더 좋은 꿈을 꿀 수 있을까 해서, 꿈을 꿀 수 있을 때까지 살을 만졌다 간혹 썩 좋지 않
은, 나의 과거도 인간의 것이라 믿고 싶었다


용서라는 단어를 배우기 전까지 나는 얼마나 아름다웠을까
중력이 위험한 나날들


주사위가 추락하는 순간
날씨가 필요했다 의문을 내려놓기 전까지 걷잡을 수 없이 또 그 육체는 솔직해져갔다


그해 여름 이웃에게 평판 좋고 친절했던 아들은 어머니의 목을 졸랐고, 옆집에 사는 중국 여자는 강간을 당했다 완강하게 저항했던 그 소리들을 오해하면
서, 나는 수차례 자위를 하다가 잠이 든 적도 있다


몸에서 가장 감동적인 부분을 멈추고 만 것처럼
인파 속에 종종 어깨를 묻으면, 묻고 싶은 질문들도 때마침 사라져갔다 모두 내가 사랑하기 시작하면 그렇게 나를 떠났다
?이별에는 질량보다 질문이 필요했을까


때때로 뜻하지 않은 슬픔 때문에 뜻을 갖게 될 때
울음을 그칠 때까지는 조심해야 할 몹쓸 선악을 믿고 싶을 때
가만히 주머니에 손을 감추고 싶다


이제야 그리운 사람들이 모두 죽었다는 것을 알았다
이유 없이도






# 박성준 시인은 1986년 서울 출생으로 경희대 국문과를 졸업했다. 2009년 <문학과 사회> 신인상에 시가 당선되면서 문단에 나왔다. 2013년〈경향신문〉신춘문예에 평론이 당선 되었다. 시집으로 <몰아 쓴 일기>, <잘 모르는 사이>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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