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장물 - 이덕규

마루안 2018. 6. 15. 22:00



장물(贓物) - 이덕규



한때 당신이 가장 애지중지하던 그것
어느 날 정체불명의 은밀한 손길에 의해 감쪽같이 빼돌려진 그것
그러고도 차마 말하지 못했던 그것
낯선 의붓아비에게마저 버림받고 이내 당신 기억 속에서 까맣게 지워져버린 그것
가까운 알뜰매장이나 청계천 고물상 혹은
청량리 양동 미아리 용산.... 이런 곳에서
신원미상의 흔한 이름표를 바꿔달고 남은 생의 은신처를 찾고 있는.... 끝끝내
그것을 알아보지 못하고 값을 묻는 당신


오늘 내가 헐값인 이유에 대해 굳이 캐묻지 말라



*시집, 다국적 구름공장 안을 엿보다, 문학동네








사랑- 이덕규



얼마나 사랑을 했으면 온몸의
핏기가 다 빠져나갔을까, 그날 밤
창백한 창문으로 스며든 예리한 달빛 조각들이
뽀얗게 드러난 가슴을
마구 난자하던


그밤, 그 어떤 뜨거운 피가
도심의 치정처럼 뒤엉킨 하구관을 따라
흘러갔다 깜박 졸던 가로등
유난히 붉은
제 발등을 내려다보며 진저리치고
달리던 차들이 이유 없이 사거리에서
덜컥덜컥 멈춰서던 밤이었다


이윽고 넓은 강물에 닿은
낮은 비명 소리를 밤물결이 찰랑,
낚아채 숨기고 흐를 때 아직 뜨거운 살이
각 떠지듯 타일 바닥 위에 발려 뒹굴고
서서히 식어가는 체온 속으로
온 생애의 오르가슴은 치달아올라 한순간
그 절정에서 감쪽같이 사라진 몸


"아무 생각 없이 했어요, 너무 사랑했어요"


가령, 피 묻은 칼 톱 망치 도끼
흩어진 달빛 조각들 곁에
어디로도, 부치지 못한 겹겹의 소포 한 묶음





# 이덕규 시인은 1961년 경기 화성 출생으로 1998년 <현대시학>으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다국적 구름공장 안을 엿보다>, <밥그릇 경전>, <놈이었습니다>가 있다. 고향에서 농사를 지으며 시를 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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