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울음의 난해성 - 이용헌

마루안 2018. 6. 14. 22:27

 

 

울음의 난해성 - 이용헌

 

 

한낮의 그늘 속에서 매미가 운다. 매미는

제 몸보다 큰 울음보를 투명한 날개 밑에 둔 까닭에

일생동안 울음을 감추지 못한다.

몸 밖으로 나온 울음들은

천지사방 그늘을 퍼뜨리고

그늘이 닿는 곳마다 무가내하로 무너지는 적요

고요의 끝자락엔 그늘보다 먼저

슬픔이 드리워져 있음을

매미는 알지 못한다.

 

한낮의 땡볕 아래서 나무가 흔들린다. 나무는

제 이파리보다 큰 그늘을 무거운 둥치 아래 가둔 까닭에

한 발자국도 걸음을 떼놓지 못한다.

뿌리로부터 전해오는 미동들은

나이테 깊숙이 속울음으로 저장되고

속울음이 터질 때마다 그늘을 당기며 일어서는 바람

그러나 바람의 나부낌이 뿌리의 속울음이라는 것을

나무는 알지 못한다.

 

한낮의 나무 아래로 사람들이 서성인다. 사람들은

나무보다 짙은 그늘을 두터운 가슴속에 둔 까닭에

한평생 속울음마저 삼켜야한다.

속으로 속으로만 쌓여진 울음들은

마음속 지평에 그늘을 이루고

그늘의 깊이만큼 깊어진 슬픔으로

해가 지고 밤이 온다는 것을

울음을 잃어버린 사람들은 알지 못한다.

 

 

*시집, 점자로 기록한 천문서, 천년의시작

 

 

 

 

 

 

만추(晩秋) - 이용헌

 

 

노란 은행잎이

노란 밥을 먹고 노란 똥을 싸고 노란 이불을 덮고 자는 저녁,

 

나는 누런 달빛 아래

누렇게 뜬 얼굴로 누런 오줌을 누다가 파르르르르르,

진저리를 친다

 

노란과 누런 사이에서 별들은 깜빡거리고 풀벌레는 찌찌거리고

갈숲 바람은 일필휘지로 허공에 갈 之자를 갈긴다

 

가서는 다시 돌아올 리 없는 흔적들

내 생엔 다시 볼 수 없는 묵적(墨跡)들

아무도 색을 섞지 않는 무색계(無色界)의 이 시간

노랗지도 누렇지도 않은 어둠의 파지들만 구름 속을 떠돈다

 

누군가 만취한 만추에 쓰라고 보내온 노전 한 냥

하늘 허리춤에 떠 있다

 

 

 

 

# 이용헌 시인은 광주(光州) 출생으로 2007년 <내일을 여는 작가> 신인상으로 등단했다. 공학과 법학을 공부하였고 방송통신대 국문학과를 졸업했다. <점자로 기록한 천문서>가 첫 시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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