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말씀의 내력 - 김일태

마루안 2018. 6. 14. 22:17

 

 

말씀의 내력 - 김일태


고등학교 진학해 시골집 떠나던 날
차부 배웅하시며
나의 흐린 인사 끝에 꼭꼭 매달아
소금처럼 댓잎처럼
당신 대신 딸려 보낸 말씀

-큰 아야, 우쨌기나
송곳 같은 이빨 맷돌같이 갈며 살 거래이

제대로 세상을
송곳같이 찔러 보지만
맷돌이 되어 보드랗게 빻아 보지도 못했지만

항시 뒤끝 흐린 날
촛불처럼 귓바퀴 환하게 밝히는
어머니 말씀


*시집, 코뿔소가 사는 집, 시와시학

 

 




냄새 나는 가계(家系) - 김일태


식당하고 화장실하고 뭣 땜에 먼지 아나?
냄새가 나니까!
어제 제 아비 따라 집으로 왔던
여섯 살 난 조카딸아이가 해 준 말
할아버지 제사 파젯날 아파트 뒤 숲길을 걸으며
멀리 두는 것이 잘 먹고 잘 버리는 것인가
먹고 싸는 일 따로일 수 없는 이유
더듬어 보는데

더럽다며 버리는 누구에게는 똥이고
맛있다고 먹는 다른 이에게는 밥은 것을

가끔 똥을 확 끼얹고 싶은 것은
이 땅에 냄새나도록 독한 밥 먹여
남새처럼 여린 것들 싱싱하게 기르고 싶은 애살 때문

사람이 진화한다는 것은
여섯 살쯤엔 알았던 사실을 커 가면서 까먹게 되는 일
알아 간다는 것은 실은 모르는 것이 더욱 많아진다는 것
아닐까

똥과 밥의 경계를 넘나들며
지게질로 순명하며 심부름하셨던 이
가신 지 하 사십 년이나 지났구나 생각에
할애비는 손자의 거름이라는 말
자꾸 헤아리게 되는데




*시인의 말

허물어져 가던 나를
안간힘으로 다시 세워 놓고 나 뒤부터
짓는다는 말이 자꾸 좋아진다.
시를 짓거나 밥을 짓거나 집을 짓거나 복을 짓거나
짝을 짓거나 관련을 짓거나
웃음 짓는 일 잦아지면서
눈물짓는 일까지도 즐겁다.
죄짓는 일 빼고는 다 좋다.
입동 동지 지난 나무가 잎사귀 내려놓듯
안분지족(安分知足)의 마음으로
약을 짓듯 집 하나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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