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손목시계, 무한궤도의 - 최세라

마루안 2018. 6. 14. 22:00

 

 

손목시계, 무한궤도의 - 최세라


물 위에 초침 치며 살얼음이 녹는다
어디서나 사과나무가 에워쌌다

투명한 팔이 붉은 과실을 중천에 던지고
다시 녹색이 돌아왔다
남자의 봄은 손목 둘레에서 매년 낡아간다
태엽 감아 시계에 밥을 주면
무한궤도의 가난이 굴레 채운 손으로

귤빛 고리 무수히 겹치며 하늘이 엮이고
할부로 산 날들 하루씩 저물어간다
서로의 밥그릇에 미안한 젓가락을 담근다

휘파람 불지 못하는 남자들이 빈방만큼 뚱뚱해진
여자를 안고 실날같은 그믐달을 파고들었다
아직 받지 못한 꽃이 있어 늙지 않는 여자들도
태엽을 감는다 오른발을 컴퍼스 삼아
동그라미 그려본다

핏줄을 관통한 실탄들이 꽃봉오리로 맺히는 정원
등에 얹힌 집 하염없이 미끄러지는 달팽이도
딱딱한 돌에 걸터앉아 허한 하루를 태엽 감는다

조용한 창들이 요란스런 풍경을 흔들어
종일 깨진 유리를 뿌려대도 조용히 물러앉아
태엽 감는 남자가 있고 그 뒤에 병풍이 있고
병풍 뒤 죽은 자의 관이 놓여 있고

끝을 잇대어 만든 시작을 기점으로
태엽 감는 사람들 손안에서 별이 녹는다

시계가 멈췄다 다시 간다
다리 길이가 서로 다른 나의 생애처럼


*시집, 복화술사의 거리, 문학의전당

 

 

 

 



동방전파사 - 최세라


앞서 가던 사람이 문득 멈춰 지목한 길목으로
스미고픈 밤

먹지에 낮을 베껴 쓴다
긴 하루가 간이영수증으로 처리되었다

어둡게 떨어지는 진줏빛 알약과
빛을 섞어 그림자 키우는 블랙홀과
백색왜성으로부터 추락해 온 사람들이
브라운관 따가운 광선에 쏘인 채
골목 너머로 비틀비틀 사라져간다

세기가 바뀌어도 귀가하지 못한
시티폰 비비전 전자사전 워크맨들
바람의 방향으로 누운 낙타 등처럼 늙어간다

무너진 회사의 제품과
부품을 더 이상 생산하지 않는 제품
고객센터에서 접수하지 않는 제품들을
환영합니다

증폭과 제어가 되지 않는 제품들을 특히 환영합니다

이 터가 흉성할 때
난청 지역에 안테나를 세워주었듯
귀를 더듬어 보청기를 끼우는 사내 하나가
블랙홀 가득 백색소음 쏟아붓는다




# 최세라 시인은 서울 출생으로 2011년 <시와반시> 신인상에 당선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복화술사의 거리>가 첫 시집이다.


'한줄 詩' 카테고리의 다른 글

찔레꽃 - 심종록  (0) 2018.06.14
세상이 어두워질 때 - 최준  (0) 2018.06.14
외로움의 깊이 - 조찬용  (0) 2018.06.14
나쁘게 말하다 - 기형도  (0) 2018.06.14
빛에 닿은 어둠처럼 - 조은  (0) 2018.06.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