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나쁘게 말하다 - 기형도

마루안 2018. 6. 14. 20:27

 

 

나쁘게 말하다 - 기형도

 

 

어둠 속에서 몇 개의 그림자가 어슬렁거렸다
어떤 그림자는 캄캄한 벽에 붙어 있었다
눈치챈 차량들이 서둘러 불을 껐다
건물들마다 순식간에 문이 잠겼다
멈칫했다, 석유 냄새가 터졌다
가늘고 길쭉한 금속을 질질 끄는 소리가 들렸다
검은 잎들이 흘끔거리며 굴러갔다
손과 발이 빠르게 이동했다
담뱃불이 반짝했다, 골목으로 들어오던 행인이
날카로운 비명을 질렸다


저들은 왜 밤마다 어둠 속에 모여 있는가
저 청년들의 욕망은 어디로 가는가
사람들의 쾌락은 왜 같은 종류인가

 

 

*시집, 입 속의 검은 잎, 문학과지성

 

 

 

 

 


여행자 - 기형도

 

 

그는 말을 듣지 않는 자신의 육체를 침대 위에 집어던진다
그의 마음속에 가득찬, 오래된 잡동사니들이 일제히 절그럭거린다
이 목소리는 누구의 것인가, 무슨 이야기부터 해야 할 것인가
나는 이곳가지 열심히 걸어왔었다, 시무룩한 낯짝을 보인 적도 없다
오오, 나는 알수 없다, 이곳 사람들은 도대체 무엇을 보고 내 정체를 눈치챘을까
그는 찬식한다, 그는 완전히 다르게 살고 싶었다, 나에게도 그만한 권리는 있지 않은가
모퉁이에서 마주친 노파, 술집에서 만난 고양이까지 나를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중얼거린다, 무엇이 그를 이곳까지 질질 끌고 왔는지, 그는 더 이상 기억도 못한다
그럴 수도 있다, 그는 낡아빠진 구두에 쑤셔박힌, 길죽하고 가늘은
자신의 다리를 바라보고 동물처럼 울부짖는다, 그렇다면 도대체 또 어디로 간단 말인가!

 

 

 

 

# 기형도 시인은 1960년 경기도 옹진 출생으로 연세대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했다. 1985년 동아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했다. 1984년 중앙일보에 입사 정치부와 문화부, 편집부에서 기자 생활을 했다. 1989년 3월 스물아홉 번째 생일을 며칠 앞두고 세상을 떠났다. 그해 유고시집으로 <입 속의 검은 잎>이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