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그렇게 협소한 세상이 한사람에게 있었다 - 황학주

마루안 2018. 6. 14. 19:01



그렇게 협소한 세상이 한사람에게 있었다 - 황학주



숨도 쉴 수 없는
행복하게 외로웠던 순간들을 안녕,
이라고 괄호 쳐두면
운명이 생각하는 시간에 대해 낙인에 대해
급기야는 우리에게 보석이 되어버리는 불취(不取)에 대해
한번은 물어줘야지 싶다
오래 말린 곳감 속에 감씨 하나로 앉아 네가 울고 있을 것 같았고
가시나무에 여윈 등을 치대고 있는
내 기다란 그림자-- 등뼈에 대팻밥처럼 보풀이 인 채 휘청이는 것도 같았다
사막보다 더 캄캄한 바깥을 보았으면 해서
우리가 커튼 안으로 숨어든 것을 일테면 예정설로 묶을수 있나
누구의 것이 된다는 마음의 시큰시큰한 통각만 아니었다면
마른나무 열매처럼 또르르 그저 굴러간 것인데,
커튼 뒤에서 막 사랑을 시작하려는 순간
누군가 부를 수 있다 한사람은 밖으로 나가야 하는


황량한 사막 커튼이 동시에 열리는 자정의 문밖이 있다면
문틈으로 영혼 상한 그림자를 끌며 나가
나는 책장을 펴고 낭독을 시작하리라
알아주렴 당신과 나 사이에 구원이 있었다



*시집, 사랑할 때와 죽을 때, 창비








나는 지나가야 한다 - 황학주



사막의 저잣거리에
이렇게 많은 맹인들이 지팡이 자국을 찍고 있는
오수(汚水) 속의 오수(午睡)


이런 날
이런 날
말라리아 후유증으로 실명한 아이들의
눈꺼풀에 흐르는 샘으로부터
꺼지지 않는 이야기를 수혈 받아본 적 있는 깨진 별똥들,
유성우 내리는 검붉은
부겐빌레아 가지 아래로
나는 지나가야 한다


아이여, 한동안 네가 나를 버리는 줄 알았다
모든 색이 다녀가 보이지 않는 색에 닿는 것 같은 거리에서
사막으로 가지만 돌아오지 않을 가시나무새처럼


문 닫은 돌 속에서 본 것 같은 기억으로 아이들이 태어나
불이 꺼진 마른 식도를 지나
불에 탄 기도를 또
지나
더듬더듬 중앙로를 찍으며 걷고 있다






# 이 시집은 황학주 시인의 열 번째 시집이다. 1987년에 첫 시집을 내고 30년이 훌쩍 지나 시인도 어느덧 60대 중반이 되었다. 시인은 어디엔가 <내가 쓴 시가 많을수록 나의 위안은 적어질 것이다>고 쓴 적이 있다. 상처를 망각하지 못하는 시인의 쓸쓸한 비애는 무엇인가. 반복해서 읽어도 여전히 좋은 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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