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끔찍한 미래 - 박세현

마루안 2018. 6. 13. 19:27



끔찍한 미래 - 박세현



나 이제 부러워할 것이 없어졌다
부러워할 것이 없으니
부끄러워할 일도 그만큼 줄어들었다
고대하던 민주 시대는 대강 와버린 것 같고
개혁 잔치도 얼렁뚱땅 끝난 것 같기에
나는 턱이나 괴고 세상을 보는 수밖에
그게 또한 나의 본업이 아니었던가
한때는 외국 작가의 소설이 부러워 잠을 설치기도 했고
어떤 여배우의 인터뷰를 보면서 그녀를 존경하기도 했다
당당한 신념으로 감옥을 향하던 지사의 신념도
내가 넘어설 수 없는 길이기에 부러운 품목이었다
내가 가지 못하던 길 위에서 일가를 이루던
사람들의 쾌주가 얼마나 아름다운 것이었더냐
이제 세기말의 골목길에서 그러나 더 무엇을 부러워하며
나머지 인생을 축내며 살아가야 할 것이냐
나 이제 부러워할 것이 한꺼번에 사라졌다
어떤 것은 자살하고 어떤 것은 체포되고 어떤 것은 실종되고
어떤 것은 해체되어 드디어 커다란 혼음의 시대가 도래했다
소련이 망하고 성수대교가 붕되되듯이
한 순간에 모든 기준이 사라져갔다
이제 단 하나도 시샘할 것이 없다
그러므로 나는 따라서 나는
문민 정부의 새벽 한시에서 두시 사이
저 창밖에 내리고 있는 말수 적은
빗소리를 받아적으며 늙어가야 하는가



*시집, 치악산, 문학과지성








운명 - 박세현



대저 운명이란
죄석버스를 타고 서서 가는 불운한 하루에서
버스 손잡이에 제대로 미치지 못하는 팔길이에 감지되는


새벽 세시
아파트 주민이 일용할 우유 상자를 하역하고 있는
남자의 장갑 낀 손에서도 그놈의 운명 냄새가 난다


하늘엔 운명을 예고하는 별들의 전광판이 화려하거늘
그러나 주최측의 무성의로 누락된 내 별자리
글로리 라이트를 피우며 나는 예감한다


등허리 저ㅡ어 구석
미치게 가려운 곳을
끝내 긁을 수 없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