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감자꽃 피는 길 - 김점용

마루안 2018. 6. 12. 21:22

 

 

감자꽃 피는 길 - 김점용


내가 아직 너의 문간에 이르지 못했으니
이곳에서 그냥 밤을 세우고 말리라
오늘 하루 얼마나 걸었을까
지는 해의 부르튼 발바닥이 보여
문을 잠근 그대여
너는 아직 들어보지 못했을 테지
이 길의 두근거림
가도 가도 계속되는 흰 꽃들의 속삭임
가만히 주저앉아 쓰다듬어보면
종일 햇볕이 데우지 않았어도
수많은 발길로 뜨거워진 길
긴 가뭄에도 땅속으로 뻗는 저 알알의 힘
너는 아직 모르고 있을 테지
간간이 한 줌의 굴욕
한 줌의 신산한 기억들도
흰 감자꽃 속에 널브러져 있지만
길을 따라 아름답게 늙어가는 사람들
너는 아직 손잡아보지 못했을 테지
문을 잠근 그대여 나는 아네
언젠가 내가 너의 문간에 이르렀을 때
너무 단단히는 잠그지 않고
조금씩 조금씩 삐걱거려주리라는 것을
끝끝내 열리지 않아 그곳에 나의 무덤을 짓더라도
아주 희망이 없지는 않게
너의 숨결엔 듯 흔들리며 삐걱거려주리라는 것을


*시집, 메롱메롱 은주, 문학과지성

 

 

 

 

 


천축사 - 김점용


중턱 쉼터에서 그만 내려가자 하였으나 당신은
이왕 나선 길 끝까지 가보자 하였습니다

갈림길에서 망설일 때에
이 길이나 저 길이나 같다 하였습니다

올라가는 길이
내려가는 길이기도 하였습니다

여긴 눈이 오는데
거긴 꽃이 피는지요

만난다 하였으나
만나지 못하였습니다




# 김점용 시인은 1965년 경남 통영 출생으로 서울시립대 국문과와 동대학원을 졸업했다. 1997년 <문학과사회>에 시를 발표하며 등단했다. 시집으로 <오늘 밤 잠들 곳이 마땅찮다>, <메롱메롱 은주>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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