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내가 아버지의 첫사랑이었을 때 - 천수호

마루안 2018. 6. 12. 19:48

 

 

내가 아버지의 첫사랑이었을 때 - 천수호


아버지는 다섯 딸 중
나를 먼저 지우셨다

아버지께 나는 이름도 못 익힌 산열매

대충 보고 지나칠 때도 있었고
아주 유심히 들여다 볼 때도 있었다

지나칠 때보다
유심히 눌러볼 때 더 붉은 피가 났다

씨가 굵은 열매처럼 허연 고름을 불룩 터뜨리며
아버지보다 내가 곱절 아팠다

아버지의 실실한 미소는 행복해 보였지만
아버지의 파란 동공 속에서 나는 파르르 떠는 첫 연인

내게 전에 없이 따뜻한 손 내밀며
당신, 이제 당신 집으로 돌아가요, 라고 짧게 결별을 알릴 때

나는 가장 쓸쓸한 애인이 되어

내가 딸이었을 때의 미소를 버리고
아버지 연인이었던 눈길로

아버지 마지막 손을 놓는다


*시집, 우울은 허밍, 문학동네


 




벌침 - 천수호


머리와 가슴 위로 파도가 지나간다
벌린 아가리만큼 하늘이 꽉 물리는 비명

어깨에 꽂힌 침이 꼿꼿해질 때
아버지 동공이 내 눈꺼풀을 밀고 들어온다
동공이 사라진 아버지의 풀린 눈

파도의 강약은 어디론가 나를 떠메고 간다

네팔의 바그마티 강,
붉은 보자기에 묶인 내 몸이
물위로 혹은 물속으로 넘실댄다
내 귀에 이렇게 물이 꽉 들어차다니

아버지의 동공은 마냥 묽어지고
내 동공은 더욱 붉어진다
침대가 뱃머리를 틀 때
미지근히 끓어오르던 진혼곡

아버지 하얗게 여윈 다리가
빨랫방망이처럼 먼저 떠내려간다
겨우 한 보따리 채운 내 몸이 기우뚱거리며 따라간다

수장(水葬)에나 따라올 법한 저 강물 소리
아버지의 욕창이
영혼처럼 내게 들어와 번진다
독이 퍼져 나는 더욱 묽어진다




# 천수호 시인은 1964년 경북 경산 출생으로 명지대 대학원에서 문예창작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2003년 조선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아주 붉은 현기증>, <우울은 허밍>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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