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배회하는 저녁 - 김명기

마루안 2018. 6. 12. 19:41



배회하는 저녁 - 김명기



시간이 허수란 걸 오래전부터 알았지만
오래전이 언제인지 알 수 없듯
놀 깃드는 바다나
놀을 등진 채 물들어 가는 세상이란
아주 없는 시간일지도 모른다
이윽고 찾아드는 어둠조차
어제 쓰다 버린 것을
다시 기워 쓰는 재활용품
애초 없는 것들이 지금 어디에나 있고
당신에 대해 그에 대해
당신과 그가 나에 대해
어떤 견해를 말하든
그건 또 다른 모른 척일뿐
환상통을 앓듯 습성이 되어 버린 고통이 지겨워
사람들은 자꾸만 죽는다, 이제
죽음보다 오래 산 사람들의 말을 끊어 버리고
더 이상 믿지 않음을 믿어 의심치 말아야지
착란을 생이라고 우기며 몰락한 과거와
오래전 들켜버린 시든 미래 사이에서
배회하듯 살아내는 것만큼
안전한 생은 없을 것이다



*김명기 시집, 종점식당, 애지








여기 - 김명기



큰 느티나무는 좋다
화살촉 같은 잎 새로 보이는 먼먼 하늘보다
이생을 향해 넓게 드리운 그늘
그늘에 앉아 어디론가 알 수 없이
흘러가는 구름을 바라본다
멈춤과 흐름의 교차점
얼마나 멀고 많은 곳을 흘러왔을까
다른 잎보다 오래 살지 못하고
저버린 잎이 바람결에 사라지듯
삶의 무게에 비해 죽음은 한순간
저렇게 가볍고 명확하게 오는 걸까


아름드리 느티나무 아래서
혼자 하는 은밀한 수음처럼
마흔을 훌쩍 넘기며 흐르고 흐르는 동안
열락과 쓸쓸함에 무너져 내리던 몸을 생각한다
흐드득후드득 숱한 잎사귀를 때리던
한여름 굵은 빗방울 무게를 기어이 견뎌낸
어느 한 잎사귀의 불안한 시절이 잠시 멈춘 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