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처음 - 하린

마루안 2018. 6. 12. 20:08



처음 - 하린
-밀애



맹독에 스친 밤
당신과 내가 밀거래한 사랑은 누구에게 발각되나
한여름 나비에게 들킨 뜨거운 키스는 어느 소문을 견디고 있나
오역은 주관과 객관 중 어느 쪽에 가깝나
나와 당신 사이에 최면을 거는 달은 몇 명이나 아이를 낳았나
연애소설의 필사본을 비밀스럽게 안고 잠든 침대에서
한 여자가 거느린 어둠은 누구를 향한 삐걱거림인가
위태로운 것은 당신이 나를 뱉어 낼 때 이마가 서늘해지는 순간이다
나는 당신이 버린 슬픔에 집착하고
혹한기엔 그 술픔을 넣고 끓인 고독을 마시며 사나흘을 앓는다
박제된 감각으로 당신이 당신을 사랑할 때
본능의 역진화로 편두통이 심해질 때
밀애의 다른 이름은 스캔들이 된다
당신은 무슨 타입의 루머를 좋아하나
맛있게 씹어 먹는 루머들
항생제가 필요한 밤



*하린 시집, 서민생존헌장, 천년의시작








방청객 - 하린



기침이 없는 아침에 대해 당신은 이야기한다
처음부터 우리가 셋이었다면 셋이 침대에서 뒹굴었다면
가장 잔인한 동거일까
무심한 옥탑방과 한심한 반지하 속에서
나는 놀람과 부러움과 야유를 남발하는 달인이 된다
독백은 내가 나의 발소리에 놀라는 거니까
난 매뉴얼대로 늙어 가고 있는 거다
그러니 밤은 감각이 없는 방청객
아침까지 돈과 몇 번 섹스를 한 거니?
그럼 넌 질문만 하다 연애를 끝낼 거니?
횟수가 중요한 게 아니라 질이 중요해
비굴함을 음식물 통에 담아 비운다
그녀가 출근한, 아니 떠난 반대 방향에서
악취가 쓸쓸하게 풍기기를 바랄 뿐이다
슬픈 건 엄마도 늙고 나도 늙는다는 거
월세의 유통기한이 늘 한 달이라는 거
너무나 버거운 혈통이 악성이고
너무나 길고 지루한 빈곤이 만성이다
그러니 통을 여는 순간 숨을 멈추는 달인이 되면 그뿐






# 하린 시인은 1971년 전남 영광 출생으로 중앙대학교 대학원 문예창작과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1998년 <광주매일> 신춘문예와 2008년 <시인세계> 신인상에 당선되어 문단에 나왔다. 시집으로 <야구공을 던지는 몇 가지 방식>, <서민생존헌장>이 있다. 본명이 하종기로 유명 원로 시인과 이름이 같아 하린(河潾)이란 예명으로 활동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