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꽃밭에서 - 송찬호

마루안 2018. 6. 12. 19:37

 

 

꽃밭에서 - 송찬호


탁란의 계절이 돌아와 먼 산 뻐꾸기 종일 울어대다
채송화 까만 발톱 깎아주고 맨드라미 부스럼 살펴보다
누워 있는 아내의 입은 더욱 가물다 혀가 나비처럼 갈라져 있다
오후 한나절 게으름을 끌고 밭으로 나갔으나 우각(牛角)의 쟁기에 발만 다치고 돌아오다
진작부터 곤궁이 찾아온다 했으나 마중 나가진 못하겠다
개와 고양이 지나다니는 무너진 담장도 여태 손보지 않고
찬란한 저 꽃밭에 아직 생활의 문도 세우지 못했으니

비는 언제 오나
얘야, 빨래 걷어야겠다
바지랑대 끝 뻐꾸기 소리 다 말랐다


*시집, 고양이가 돌아오는 저녁, 문학과지성사

 

 

 

 

 

 

맨드라미 - 송찬호


맨드라미 머리에 한 됫박 피를 들이붓는 계관(鷄冠)식 날이었다    
폭풍우에 멀리 날아간 우산을 찾아 소년 무지개가 집을 떠나는 날이었다    
앵두나무 그늘에 버려진 하모니카도 썩은 어금니로 환하게 웃는 날이었다

멀고 가까운 곳에서 맨드라미 동문들이 찾아와 축하를 해준 날이었다
봉숭아 금잔화 천일홍 등으로 구성된 장독대 악단의 찬조 공연도 펼쳐진 날이었다
우리도 가만있을 순 없지, 일요회 소속 맨드라미파 화가들도 풍경화 몇 점 남긴 날이었다

이건 약소한데요, 인근 슈퍼에서 후원한 박카스도 한 병씩 돌리는 날이었다
오늘 참 이상한 날이네 웬 붉은 깍두기 머리들이 이리 많이 모였지?
땀 뻘뻘 흘리며 나비 검침원이 여기저기 찔러보고 날아다니는 긴긴 여름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