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늙은 호박의 학명을 묻는다면 - 심은섭

마루안 2018. 6. 12. 19:53

 

 

늙은 호박의 학명을 묻는다면 - 심은섭 


최초의 학명은 <김수로왕과> 왕족이었을지도 모른다 
아니면, 회색 담장 밖 세상을 동경하는 
<팔월의 사형수>에서 감형된 장기모범수였을까 

열매는 꽃의 유언이므로, 그는 
날마다 부활하는 수만 개의 태양이 쏟아낸 압정에 
스스로 화상을 입어야 했겠다 
그는 신목(神木) 잡고 카인의 원죄를 비는 무녀의 
푸른 눈빛이어야 했겠다 
18번, '시월의 마지막 밤'을 부르던 
늦은 오후 
교전수칙을 지키며 성지 순례를 끝내고 걸어온 
길을 말아 피운다 그의 온 몸은 길이다 
둥근 영토, 빈 내장 
그렇게 비워지고 둥글어지던 날 

탐정이 찾아와 행방불명 사내의 신발문수를 기록했다 
국적이 허기져도 위조지폐는 찍어내지는 않았다 
호각소리에 실어증 걸린 새장 속 새벽은 매일 죽었다
머리 쪽으로 날아든 총탄을 향해 늘 웃고 있었다

식물도감에서 <열녀부인과>로 학명을 분류하던 
사관(史官)이 비문을 쓴다 
동지섣달 
선자령 눈꽃 트레킹하는 현고학생뭉게구름신위라고

 

 

*시집, K 과장이 노량진으로 간 까닭, 문학의전당

 

 

 

 

 

 

뚝섬을 지나 구로디지털역까지 - 심은섭


1.
잉크냄새에 취한 잡지들 마네킹처럼 앉아 있다
이 새벽, 무슨 말을 하려는 걸까
클로즈업된 잡지 표지 속
노랑머리 나체
조간신문은 또 누굴 기다리고 있는 걸까
환승을 기다리며 옷깃을 세운 뚝섬 역
사금파리보다 더 차다
<연탄 한 장에 240원에서 500원>
이라는 신문 헤드라인이 낯선 시간들과 부딪히는
플랫폼으로 공복의 파충류 한 마리 들어 온다
어긋난 뼈를 맞추며 어둠의 중심을 깬다

2.
역마다 쪽방의 발가벗은 사람들을 집어 삼킨 전동열차
울컥 나를 쏟아낸다
찾던 그는 없다
실종된 기억조차 돌아오지 않는다
구로디지털역의 정강이가 깊게 패여 보이는 저녁
좁혀지지 않던 눈과 눈 사이의 경계
하현달 떠오르듯
하늘로 보낸 태양을 하관(下棺)하고 있다
는 문자 메시지

3.
발목 묶인
시선 하나
저녁 하늘에 내건 조등(弔燈)을 보고 있다




*시인의 말

나의 원시적인 문학으로부터의 탈피를 위해, 시인이 한낱 사치스러운 신분이라고 말하는 대상물에 대해, 아니라고 변증법으로 부정을 할 수 있는 나의 유일한 방법은 <K 과장이 노량진으로 간 까닭>을 찾아내는 일이었다. 보름달을 수태할 초승달 같은 심정으로 밤낮 쉼 없이 찾았던 그 까닭을 이제 눈부신 세상에 조용히 펼쳐 놓는다. 무거웠던 억압의 체중이 조금 가벼워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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