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주검을 남긴 사내 앞에서 - 강영환

마루안 2018. 6. 12. 19:24

 

 

주검을 남긴 사내 앞에서 - 강영환

 

 

사물이 된 그의 손을 잡는다

손을 잡고 보니 그게 아니다

생각과 달리 따뜻한 그가 나를 냉각시켰지만

그것은 굳은 표정 속에 잠겨있던 그의 언어였다

무엇 때문에 가슴에 불을 끄지 않고 있는 걸까

그가 문을 열어놓고 기다리는 사람은 누구일까

식지 못하고 남아 있는 가슴이 안타깝다

 

그도 따뜻한 과거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캄캄한 벽을 남기고

어둠이 되어 떠나는 사람의 무게를 느껴 본다

한 사람이 남긴 어둠의 크기를 재어 본다

누가 와서 끊어주지 않았다면

홀로 그의 손에 얼어붙었을 터인데

무거워지는 어둠 곁에서 나는 또 어두워진다

 

서로 눈을 맞춰 보지는 않았지만

먼 길을 돌아서 나와 마주 한 그도

한 번쯤 나를 생각했을까

오랜 생각 끝에 흔들릴 때도 나는 무거워지지 않고

그때서야 사물이 된 그의 손을 놓는다

가슴이 식지 않는 그는

사물에서 돌아 나오지 못한다

 

 

*시집, 집을 버리다, 신생

 

 

 

 

 

 

반 지하 - 강영환

 

 

한 발은 지상에 또 한 발은 지하에

그 조건에 전세금을 걸었다

계단을 내려서면 벌써

눈은 어둠에 익숙해지고 몸도 반은 지하다

 

주머니를 털어 마련한 제라늄 분도

잎 하나는 햇빛에 두고

다른 하나는 그늘에 두고

사는지 죽어 가는지 모르던 때

물은 얼룩을 타고 벽에 숨어들었다

 

시련 끝에 선 제라늄이 활짝 꽃을 피운 날

나머지 그늘도 환한 빛이 되어

얼굴 펴고 가는 높은 창유리에

몹쓸 십 년의 햇빛이 반짝 지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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