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나 같은 건 아무것도 아니라며 - 이상국

마루안 2018. 6. 12. 19:21



나 같은 건 아무것도 아니라며 - 이상국



거마리 고개 넘어 절집 가서
푸른 머리 새 한마리 보았습니다
숲이나 물가에서는 인기척만 나도
기겁을 하고 달아나는 물새 한마리
말 많은 참새들 틈에서 밥 먹는 걸 보았습니다
아침저녁 공양 때마다
산속 어디선가 온다는데
스님들도 먹어야 부처를 모시고
깃털 같은 몸뚱이도
먹어야 사는 건 다 아는 일이지만
저렇게 아름다운 모습을 한 그가
밥 얻어먹으려고
절마당이나 기웃거리는 게 슬퍼서
나 같은 건 아무것도 아니라며
세상으로 돌아왔습니다



*시집, 어느 농사꾼의 별에서, 창작과비평








줄포(茁浦)에서 - 이상국



동해에서 조반을 먹고
줄포에 오니 아직 해가 남았다
나라라는 게 고작 이 정도라면
나도 왕이나 한번 해볼걸


큰 영 하나만 넘어도
안 살아본 세상이 있고
해 질 때 눈물나는 바다가 있는데
나는 너무 동쪽에서만 살았구나
해마다 패독산(敗毒散) 몇첩으로 겨울을 넘기며
나 지금 너무 멀리 와
다시 돌아갈 수 있을지 몰라
그래도 며칠 더 서쪽으로 가보고 싶은 건
생의 어딘가가 아프기 때문이다


이게 아니라고
여기가 아니라고 추운 날
기러기 같은 생애를 떠메고 날아온
부안 대숲 마을에서
되잖은 시 몇편으로 얼굴을 가리고
몰래 만나는 여자도 없이 살았다고
지는 해를 바라보고 섰는데
변산반도 겨울 바람이
병신같이 울지 말라고
물 묻은 손으로 뺨을 후려친다


나는 너무 일찍 서쪽으로 온 모양이다






# 두 시가 전부 아주 착하게 술술 읽힌다. 겸손이 밴 삶이 저절로 느껴진다고나 할까. 이래도 한세상 저래도 한세상이라는 유행가처럼 한 번뿐인 인생 이렇게 겸손하게 사는 것도 괜찮지 싶다. 이런 시를 읽을 때 막막한 슬픔은 잠시 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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