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낮 열두시부터 한시 사이 - 박남원

마루안 2018. 6. 11. 23:12

 

 

낮 열두시부터 한시 사이 - 박남원

 

 

사방으로 날리는 사모래가루가

널무러진 철근, 반네루 위거나

우리들 머리 위로 평등하게 내려 앉는

낮 열두시부터 한시 사이

 

서둘러 꺼칠한 점심을 먹은 후

미장공들은 스치로폴을 깔고 낮잠을 자고

우리들 데모도꾼도 허기진 휴식을 위해

구석진 자리를 찾아 잠을 청한다

 

첫눈이 빠르게 한차례 오고 난

십이월 중순의 회색빛 하늘

허리와 옆구리에 들어붙은 냉기를 문지르며

다독이며 청하는 잠 속으로는 어렴풋이

불투명한 개인적 평화가 어른거리고

밥이 되지 않는 시를 버리고 쫓기듯 찾아온

노가다판에

버릇처럼 남북통일이 어른거리고

어른거리다 가볍게 사라지는 꿈결같은

낮 열두시부터 한시간 동안의 짧은 휴식시간

 

콧구멍이 시커멓도록 쌓이는 먼지일지라도

평등하므로 이곳에선 아무도 불평할 줄을 모르듯

세상에서 진실이 밥이 될 수 있고

모든 인간이 진실 앞에서 평등해질 수만 있다면

내가 이렇게 세상에서 낙엽처럼 떨어져 앉은 자리는

그러나 얼마나 행복하랴.

 

 

*시집, 내일이 아니어도 좋다, 연구사

 

 

 

 

 

 

산다는 것 - 박남원

 

 

산다는 것은 아름다운 일이다

눈물로 타들어가는 아우성일지라도

살아서 저 푸른 별들을 향해

혹은 폭포수처럼 쏟아지는 눈보라 속을

천천히 그러나 살아 일어서 걸어오는 저 수많은 논과 밭들을 향해

한움큼의 기꺼운 껴안음이거나

백양목처럼 허연 웃음으로 긴밀하게 내통하는

흔들리지 않으며 우리가 우리의 이름으로

산다는 것은 저 논과 밭들과 뜨거운 숨결로 뒤섞여

흙투성이가 되어 목숨을 기르는 그런 것들과 어깨동무하고

오 산다는 것은

땀흘려 맺는 싱싱한 청보리처럼 투명한 눈을 뜨고

마침내 지상에 붉은 해가 뜰 때까지

식구들이 돌리는 기계 쇳소리 밤새

쇳소리 먼지구덩이 깔끔하게 덮어놓은 가식의 공장 지붕 위로

언젠가 단 한번 붉은 해가 뜰 때까지

인간의 희디흰 속살 에누리 없이 비추는

 

평평한 곳에서의 만남을 위해

인간이지 못하게 하는 이 세상 모든 것들과

싸운다는 것 산다는 것은

분노로 뒤척이는 긴 불면의 밤과

아버지의 살아 온 전 생애를 내동댕이쳤던 굳고 잔인한 세월을 뚫고

무릎치듯 피어나는 정갈한 꽃잎과

이제부터는 울지 말아라 아가야

진절머리 나는 학살과 이리떼들은

우리의 기나긴 싸움으로 기필코 무찔렀느니

전 논과 담벼락 어귀 어디에도 어둠은 고이지 못하리라

세상에 가지지 못하여 서러운 사람들은

가진 자들의 사유와 욕망이 사라짐으로 인하여

우리일 수 없는 모든 벽은 무너져 더 이상 어둠은 고이지 못하리라

산다는 것은 그리하여 그날이 올 때까지

살아 끝까지 싸운다는 것은 아름다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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