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그곳에 갔었다 - 최금진

마루안 2018. 6. 11. 21:29



그곳에 갔었다 - 최금진



조약돌 속에 잠든 네 얼굴로 물수제비를 뜨면
찰방찰방 건너가는 한숨이여, 소금쟁이여
나는 물 위를 걷는 기적을 믿었었다


아내는 드라마 주인공을 짝사랑하고
아이는 천식을 앓는다, 밤 깊은 곳에서 하루를 건너가는 배가
폭죽을 쏜다, 콜록콜록,
어디로 가는지 인부들에겐 목적지가 중요하지 않다


성배를 지키는 십자군처럼
얼음장 밑에 흰 머리카락을 기르며 늙어가는 내가
아직도 그곳에 갇혀 지느러미를 흔들며 헤엄치고 있다
그곳에서 말이다, 지옥 같은, 낙원 같은 그곳에서


아들아, 아비가 살인죄를 짓거든 어떻게 할래
그런 슬픈 숙제는 내지 말아요, 엉엉
호랑가시나무 한포기를 폐교 운동장에 심어놓고, 아이도
세상에 없는 크리스마스를 기다리게 될까


기적을 보여다오, 기적이 아니라면
어떻게 여길 건너갈 것인가
눈먼 두더지처럼
그 겨울 눈 속을 종일 뚫고 너의 집으로 가는 길을 만들었을 때
너는 네 어머니처럼 늙고 병들어
젊은 나를 바라만 보고 있었다, 신이시여, 왜 오지 않으십니까


아내도 나처럼 침대에 누워 제 몸을 만진다
우리들 잠엔 찬송가처럼 아름다운 후렴구가 없어서
잠든 아들의 어깨가 가냘프다
뒷산에선 달이 닻을 거두어올린다
포승줄에 묶인 채 나무들이 고개를 숙이고 우리를 바라본다


당신 자신을 위해서 우세요, 아내는 꿈속으로 흘러가고
나는 아무것도 남은 게 없는 사람이 되어, 언제고
그곳에 갈 것이다, 그곳에 갔었으니까, 그곳에 갈 수 있을 것이다



*시집, 사랑도 없이 개미귀신, 창비








선운사 - 최금진



몇번을 왔다가 입구에서 돌아갔다, 선운사
갈 기분이 아니었고, 가야 할 때가 아니었고, 날이 저물었고, 싸웠고 또 싸웠고
약장수들이 꺼내놓은 신경통에 좋다는 두충과 위염에 좋다는 드릅나무, 겨우살이
겨우겨우 살았던 놈이 부처에게 무얼 더 내놓고 가야 한단 말인가
버스가 떠나고, 매연처럼 콜록거리는 어머니와 둘이 남아
신세 한탄이나 할 것이지, 무슨 재미로 상사화를 보다 갈 것인가
위대한 시인의 시비 앞에서 시비나 걸고 싶은 마음
선운사는 보지 못하고 선운사가 있다는 표지석만 보면서
지상에 진짜 선운사는 없을지 모르지만 그래도 선운사 왔다 간다고
후일 몇번의 여행 기록을 자랑할 때 얼마나 미쁘게 선운사를 들먹일까
거기 동백이 좋았어, 여자애들 잠지 같은 꽃
기린 같은 나무들 모가지가 고향까지 돋아난 길
집도 버리고, 사람도 버리고
초저녁 막걸리에 취해 우는 우리 어머니 같은 꽃 말이야, 미친놈아, 미친놈아
미친 건 아닌데, 술을 마시지 않아도 미치게 되더라, 나이 사십쯤에도 말이야
몇번을 왔다가 갔는지 몰라, 선운사, 서운해서 선운사
부처야 죽은 다음에 만나면 될 것을 뭘 그리 서둘렀던가
도랑물에 앉아 돌멩이나 함부로 던지며 늙은 어머니와 싸웠다
다신 오지 않겠다고, 이렇게 먼 길을 왜 미련스럽게 왔다가 가는지 모르겠다고
도대체 선운사가 있으면 내게 달리질 것이 뭐가 있다고, 그깟 선운사
그깟 사랑, 물수제비를 뜨면 순식간에 건너편 동백숲에 가 박히는 저녁 별 몇 개
조상 중에 누가 지극한 공을 들여 나신 몸이라는데, 고작 이러려고 어머니와 나는
선운사에 가보지도 못하고, 돌아갈 버스나 기다리나, 선운사





# 최금진의 시는 긴 시가 많다. 누구는 짧은 시 쓰기가 더 힘들다 했으나 긴 시 또한 문장을 끌고 가는 힘이 없으면 시도 아니고 산문도 아닌 것이 되기 십상이다. 긴 시가 술술 읽히는 것도 밀도와 긴장감이 함께 들어있는 시 덕분이다. 읽고 나서 다소 불편함이 있어도 다시 읽게 만드는 묘한 흡인력이 있다. 다음 작품을 기다리며 주의 깊게 지켜 보는 시인 중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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