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나의 역사 - 류흔

마루안 2018. 6. 11. 21:00

 

 

나의 역사 - 류흔


나는 나를 모색해왔으며
나로부터 역전될 수 없다
지난 사십여 년간 나는 낙후되었으며
그것은 매우 점진적이었다
타인이 보기에 나는
모든 면에서 덜 개발된 듯이 보였을 것이며
내가 아닌 나에 대해
꼭 집어 규정하기가 거시기한
그런 존재다
고생대 화석에도 나타나는데
나는 수억 년 전부터 고생스런 삶을 살도록 운명지어졌으며
한 사천 년 전에 한 번 
천오백 년 전에 한 번 
그리고 엊그제 한 번
이렇게 세 번 정도 행복했던 기억이 있다
결정적으로 나의 빈곤은 완벽한 충만에서 비롯되었으며
지난 신생대에 잠시 신생의 삶을 살았듯이
나는 어떤 신비 속으로 나를 밀어넣고 싶다
붉은 입술 속으로 혀를 밀어넣듯
세월을 구애하거나, 구걸하는
나와는 다른 나의 시간을 포옹한다
어떤 식으로든 결과를 갖는
비교적 안간에 가까운 나는,

 

 

*시집, 꽃의 배후, 바보새

 

 

 

 

 

 

좋은 세상 - 류흔

 

 

나는 무일푼이고, 친구와 헤어졌네

작심만 하면 다시 볼 수도 있겠지만

그런 이유로 헤어진 친구들

작심하지 않기로 했네

 

나를 보증하는 건 빚밖에 없네

나는 나를 설명하거나 요약할 수 없고

나앉아 있다가 비켜주는 삶이

짐짓 익숙하고 평화롭다네

 

일어날 수 있는 일은 어디에도 없고

모르는 사람의 물음과 대답은 한통속,

사람의 계절 밖에 우두커니 서 있으니

내가 모르는 사람이 나인 걸 어쩌겠나

 

얻은 술이 좋아서 세상도 좋아지네

돌아가는 골목길은 가로등 밑에 누워 있어

물렁물렁해진 바지를 아무 데나 걸어놓고

어둠의 둥근 바깥으로 영역 표시를 한다네

 

 

 

 

# 류흔 시인은 1964년 경북 안동 출생으로 2009년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창작지원금을 받아 2011년 시집 <꽃의 배후>를 발간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2011년 <시산맥>으로 재등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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