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빈 병 - 전성호

마루안 2018. 6. 10. 23:50

 

 

빈 병 - 전성호

 

 

빈둥거리는 나이가 되면

구석 빈 병처럼 웅크린 채

부려놓고 간 폐지 뭉치나

빈 박스를 챙기면서 전에 듣지 못한

소리에 귀가 열린다

향일성의 식물들 온몸 비틀어

해를 따라가는 소리

자전하는 지구 위를 소리 없이

지나가는 아득한 별들의 소리, 쓸데없이

호루라기 소리를 쏟아놓는 위병소 옆 면회실

누가 차기 대선 주자인지 입방아 찧는 소리

한 그루 침묵을 망고 나무에 옮겨 심는

큰 손 가진 이의 숨소리

말없이 구겨진 폐지 한 장 반듯하게

펴놓는 손바닥 스치는 소리.

 

 

*시집, 먼 곳으로부터 먼 곳까지, 실천문학사

 

 

 

 

 

 

耳鳴 - 전성호


벚나무 둥치를 품은 말매미
허물로 한 철을 살아낸 집
쉰내가 날 때까지 플라스틱 통에
팥떡, 망개떡, 찰떡을 팔던
해운대 백사장

성질 급한 놈, 오토바이 경주에 한몫 끼어들었는지
설쳐대는 마후라 똥구녕 찢는 소리

한여름 매미들
굵고 짧게 사는 것도 몸서리쳐지기는 마찬가지라
저리 당당히
우는 법을 터득한 것인가

쥐어짜는 매미들의 입술을 쫓아
긴 여름을 가는데
죽음에 다 가닿은 말매미들
날카로운 울음 모래사장을 넘는다
허물 같은 빈집만 허공에 남기는
내 귓속의 매미 소리.

 

 

'한줄 詩'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서어나무 - 전영관  (0) 2018.06.11
내 몸에 길 하나 생긴 후 - 임후남  (0) 2018.06.11
종이꽃 피던 날 - 서석화  (0) 2018.06.10
헐 겨, 말 겨? - 차승호  (0) 2018.06.10
십자가 진 사내 - 이종형  (0) 2018.06.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