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십자가 진 사내 - 이종형

마루안 2018. 6. 10. 19:05



십자가 진 사내 - 이종형



십자가 진 사내를 알고 있다네
한 사내는 세상을 구워하러 다녀간 하느님의 아들
또 한 사내는 세상을 세상답게 만들고 싶었던 사람의 아들


가시면류관 대신
놋쇠 숟가락이 얹힌 심장
핏빛 선연한 채
관덕정 광장에 내걸린 주검
칠십 년 전 그 이름을 여전히 기억한다네


과일 두어 개에 막걸리 서너 병 챙겨 들고
그를 만나러 가는 길
복받친 밭 어디쯤, 유월 숲길에 들면
조릿대 숲을 흔드는 바람이거나
한라산 까마귀의 울음을 빌어
환청처럼 들리는 목소리 있네
애써 불러내지 않아도 먼저 다가오는
발자국 소리 들을 수 있네


녹슬어 숲의 풍경으로 남은 청동밥상 위에
툭툭 떨어진 때죽 꽃잎은 무심한데
퇴주잔을 나눠 음복하며 다시 생각하네


한 사내는 하늘로 떠오르고
한 사내는 태워져 바다로 흘러갔으니
이 땅에 남은 우리는 어디로 가야 하나


십자가에 매달린 사내를 알고 있다네
한때 이름을 부르는 일조차 허락되지 않았던
젊은 혁명가를 알고 있다네



*시집, 꽃보다 먼저 다녀간 이름들








애월 - 이종형



여긴
사랑을 고백하기 좋은 장소가 아니야
다녀간 열에 다섯은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는 소문이 들려


헤어진 이들이 뱉어낸 탄식이 쌓여 더 푸르러진
그 바다를 바라보며 지금 뉘우치고 있는 중


긴 머리 풀어헤친 채 둥둥, 겨울 파도 위에 떠오른
여인을 기억해
구급차는 경적을 죽인 채 응답 없는 신호만 바다로 보내고 있었지
달빛이 자꾸 손에서 빠져나가 잡히지 않자
스스로 달이 되려 했다는데 그건 그냥 소문일지도 몰라


포구는 배를 띄어본 지 오래,
작은 배 몇 척 눈물 같은 실금으로 몸이 갈라지고 있어
사랑은 그렇게 낡아가고
모든 약속도 끝내는 금이 가지


절벽은 죽은 이들을 위한 처소
그러니 나 없이 돌아온 당신은
이 바다 위에 뜬 달빛을 붙잡으려 하지 마라


애월은,
애월 바다는 그냥 담담하게 바라만 봐
부디 이 깊고 푸른 물빛에 마음 뺏기지 마





# 이종형 시인은 1956년 제주 출생으로 2004년 <제주작가>로 작품 활동 시작했다. 등단 13년 만에 첫 시집 <꽃보다 먼저 다녀간 이름들>이 나왔다. 긴 시간 잘 숙성된 시가 절절하게 다가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