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말목에 이발소가 있다 - 김연종

마루안 2018. 6. 10. 18:47



말목에 이발소가 있다 - 김연종



말목에 이발소가 있다
면사무소와 지서 초등학교가 있고
김영희 대서방 옆에 그 이발소가 있다
말목에 있는 이발소는 관공서이다
대목에 이발소는 늘 바빴다
일년에 딱 두 번 만 머리 손질하는 종실이 아재는
새벽닭이 울기도 전에 말목으로 갔다
이발소 유리창엔 <만원사례> 팻말이 내걸리고
오래 대기 중인 사람들 사이를 가로질러
가장 먼저 머리 손질한 늙은 대머리 지서장은
몇 올 남지 않은 머리카락 다칠까봐
아침부터 신경질을 부리고
머리 힘이 무척이나 센 지서 차석은
동백기름으로 또 다시 머리카락에 힘을 보탰다
면장부터 말단 면서기까지
관공서 머리공사가 다 끝나고 나서야
나는 거울 앞 의자에 앉을 수 있었다
바리캉에 머리가 뜯겨나가고
면도날에 목덜미가 긁혀도
가죽숫돌로 퍼렇게 날이 선 면도날 앞에서 주눅 든
까까머리 뒤통수엔 찬바람만 시려왔다
창틀 사이 바람막이로 붙여놓은
색 바랜 달력 속의 발가벗은 여인만이
아무도 몰래 내게 미소 짓고 서 있었다



*시집, 극락강역, 종려나무








가죽잠바 입은 사내 - 김연종



그는 늘 검정 선글라스를 끼고
가죽잠바만 고집했다
검정 가죽잠바 구두약으로 광택을 내고
지게차 옆에서
지휘봉 같은 작대기를 들고 서있으면
작업중인 인부들은 그 곁을 슬슬 피해 다녔다.
꼬깃꼬깃 배추 시래기 같은 지폐를
가죽잠바 안주머니에 깊숙이 쳐박고
공사판 인부들을 홀렸으며
작업 지휘중인 십장을 후려쳤다
오리털파카 오리털이 흙먼지처럼 폴폴 날리고
밍크코트 밍크들이 길바닥에 뒹굴면서
가죽잠바는 빛을 바래기 시작했다


의정부행 지하철 1호선,
진한 선글라스 구겨진 가죽잠바
더듬이 같은 지팡이를 집고
아코디언 연주 하고 있는 저 늙은 사내
빈 바구니엔
천 원짜리 지폐 한 장 없이 하얀 동전들만
형광등처럼 깜박거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