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두루마리 휴지가 풀려가듯 - 배정원

마루안 2018. 6. 10. 18:31



두루마리 휴지가 풀려가듯 - 배정원



한 친구가 내게 말한다
너는 이제 잘 풀려가는 것 같다고
그래, 난 요즘 잘 풀리고 있다
두루마리 휴지가 잘 풀려가듯
그렇게 잘 풀려서
生의 내리막길을 쾌속으로
질주하고 있다
잠시의 멈춤도 없이 구르다
구르다 돌아보면 한줄기 위태로운 하얀 선
끊어질 듯, 끊어질 듯 이어지는 얇은 목숨
바닥으로만 내달리는
가속이 주는 현기증 속에서
기억할 것도 없는 지나침 속에서
그래, 난 아주 잘 풀려가고 있다
마침내 살은 다 풀어 버리고
한 개의 마분지통으로 남아 관 속에
툭,
떨어질 그날까지
길바닥에 나를 바르며, 나를 벼르며



*시집, 지루한 유언, 청년정신








길가, 버려진 의자 - 배정원



나를 찾지 못한 날들에
대해 생각했다, 나를 찾지 못하여
너를 잃어버리고
쏘다니던 길거리들에 대해
허기를 재우던 담배연기
또는 새벽 골목길의 헛구역질에 대해
아무도 상관없는 결심과
그 스러짐에 대해 생각했다


녹슨 의자다리가 내 작은
체중 하나 못이겨 비틀거리는 밤
늦은 귀가길
어떤 숫자의 버스가 와도 난
이 자리를 떠날 테지만
버려진 의자를 다시 버릴 것이지만,
정거장을 서성이며 오래도록
내가 버린 시간들을 되새김질 하고 있을
내 그림자를 생각하니 끔찍했다


가끔 흩뿌리던 비도 그쳤고
막차도 오지 않으니
새로운 담배에 불을 붙이고
이제 일어서볼까, 동전 몇 닢의
짤랑거리는 소음에 귀 기울이며
마음의 정거장을 그만 떠나가볼까
길가, 버려진 의자
이 불안한 균형을 등 뒤에 두고서





# 운명에도 유통기한이 있는 걸까. 한없이 자신을 학대했던 지난 날을 돌아보면 참으로 아득하다. 어떻게 견뎌냈을까. 누구든 자기 삶이 곡절도 사연도 많다고 생각하는 법, 나 또한 예외는 아니다. 첫 시집을 내고 20년 동안 소식 없는 시인의 안부가 궁금하다. 누렇게 뜬 청춘을 떠나 보내고 귀밑머리 하얀 중년에도 소년처럼 축구장을 뛰어다니고 있을까. 시 읽는 인생이 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