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종이꽃 피던 날 - 서석화

마루안 2018. 6. 10. 23:49



종이꽃 피던 날 - 서석화



달빛이 아파서 창문을 닫는다

배경부터 엇갈렸던 풍경

눈감으면 더 환한

여백으로 남기고

한때는 살뜨겁게 타올랐던

사막같은 시간

이제는

깨어야 할 선잠 속의 꿈으로

둘려 세울 일이다

세상은 온통 물기에 젖어

가만히 있어도 저절로 부풀지만

슬픔보다 빠른 속도로 피어나는

무명빛깔 종이꽃

향기없는 키를 늘인다

만개한 아픔도

누군가는 아름다움이라고 했던가

헛되고 헛된 아름다움의 뒷전에서

이제사 고요히 드러눕는

쓸쓸했던 영광

한 번만 더 울고 보낼 일이다

그렇게 영영 잊어버릴 일이다



*시집, 종이 슬리퍼, 나남출판사








근황 - 서석화



가여워라 슬픔이 독을 피우는 대낮

빌딩에 꽂히는 햇빛 요란하다

원하지 않았던 병상의 시간은

어느새 가을까지 끌어가버려

차가운 하늘에 걸린 위독의 팻말


살아내야 할 낯모를 시간

막막하고 추워라

나 아직 더 다칠 무엇이 남아 있어

초겨울 햇살 저리도 칼날 같은가

햇살 밝음도 아직 내 탓인가

숨조차 목에 걸리는 입술 열어

찾고 싶은 이름

하늘 땅 뒤집어도 하나인데

그리움은 왜 이리도 무더기로 오는가


레이저로 지지고 칼끝으로 후벼낸

상처 아물어도

그 이름 늘 새로 피는 꽃 같아라

나 지금 꽃밭에 누워 있으니

아는가 이 독한 향기로움






# 서석화 시인은 1961년 대구 출생으로 동국대 대학원 국문과를 졸업했다. 1992년 계간 <현대시사상> 신인상에 당선되어 문단에 나왔다. 시집으로 <사랑을 위한 아침>, <종이 슬리퍼> 등이 있다. 그 외에 산문집과 소설 등 여러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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