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그리운 시절 - 서영택

마루안 2018. 6. 8. 23:01

 

 

그리운 시절 - 서영택


아무도 그 집에 산다고 말하지 않았다

블록 담 열두 가구가 사는 집
늙은 쥐와 새끼 쥐가
그늘과 햇빛을 몰래 드나들고

담장 널린 햇빛에 홑청이불을 널었다
대문 밖에는 연탄재가 쌓인다

어디선가 된장 끓는 냄새,
좁은 한 뼘 그늘에서 아이들이 자라고

골목길에
종을 흔들고 회전목마가 왔다
아이를 업은 새댁들 수다가 벌어지는
동네 뉴스 스튜디오
간밤 생긴 일에 손뼉을 치고 듣는
여자들의 어머, 어머 눈동자가 커진다

이웃들이 주소 대신 붙여 부르던 정든 별칭,
열두 가구 집
큰소리 한번 없이 정붙여 살았다고
청춘 시절이었다고
그 사람들 다 어디 갔을까


*시집, 현동 381번지, 한국문연

 

 

 




잡초 - 서영택


1
경부고속도로가 개통되던 해, 우리는 실업계 고등학교 졸업을 앞두고 무교동에서 낚지복음을 먹었다 부글부글 끓는 카바이트 막걸리를 마시며 장래 걱정과 군 입대로 밤을 새웠다 누군가는 은행에 취직을 하고 누군가는 세무서에 취직을 했다 

10년이 지나 군사정권 시절,
서울대보다 육사가 최고라는 말이 유행하였다
일상이 기계처럼 흘러갔고
눈치 빠른 친구는 부동산 재테크를 했고
룸살롱에선 귀족 스포츠인 골프가 단연 화젯거리였다
독재정권 부당성에 열을 올리던 친구는
왕따 당해 죄 없는 소주병을 혼자 비웠다
명동성당 종소리가 울려 퍼지는 뒷골목
우리는 모두 잡초처럼 한 시대를 관통했다

2
20년이 지났다 모두들 늙어갈 때에 다 큰 자식들이 직장에 취직을 하고 시집 장가를 든다는 청첩장이 돌았다 자본주의 사회구성원이던 사람들이 하나둘 정년퇴직을 했다 자영업으로 성공한 친구는 어깨에 힘이 들어가고 주도권을 잡았다 룸사롱에서 골프 이야기에 침을 튀기며 열을 내던 친구도 보이지 않았다 결혼식장이나 상갓집은 동창회 만남의 장소였다 잘 키운 자식들의 성공담들이 안줏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모두들 머리털이 빠지고
늙수구레한 모습들
서로를 마주보고
그저 맘 좋은 영감처럼 웃어댄다
70년대 피를 토하며
청춘을 논하던 모습은 어디에도 없다
안개처럼 가물가물한 옛일들
어디로 갔을까 희망 잃은 잉여인간들
백치처럼 텅 빈 머릿속
온통 잡초만 가득하다




*시인의 말

시는 내 인생에서 덤으로 얻은 것이다
시보다 더 아름다운 불륜을 경험하지 못했다
마음 한 켠 빛나던
시의 말들은 매순간 황홀하고 설렜으며 고통이었다
나를 다녀간 빛나는, 상처의 궤적으로 남은
불륜한 시의 말들을 내보낸다
늦게 외도한 시의 현장을 들켰다!
좋은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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