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우리들의 자세 - 허은실

마루안 2018. 6. 8. 22:40

 

 

우리들의 자세 - 허은실


내가 일곱 살이었을 것이다
아버지 앞에 다리를 벌린 여자
또 딸이었다

들일 때나 낼 때 지울 때에도
같은 자세인 이유
산부인과에 누워 생각한다
여와도 하와도
다리를 벌리고 싶었을까
가이아도 가시나들처럼
치마를 걷고 오줌을 누었을까

따뜻하고 둥근 방
꽃길 속으로
나비 한 마리 팔랑
날아간다
고요한 세계가 진저리친다
태초의 길들 새로 깨어난 통증을 기억한다

비누 때문이었나
욕탕 가득 싱싱한 오이 냄새
공중목욕탕에서 늙은 여자들
시든 오이꽃 같은 젖꼭지
정성스레 닦는다
돌아앉아 밑을 씻는다
세세만년 이러했을 것이다
언제나 마지막까지 자세가 남는다

폐경의 어머니
아이 하나 낳아달라신다


*시집, 나는 잠깐 설웁다, 문학동네


 

 

 

 

처용엘레지 - 허은실


여기 잠든 짐승
나의 이승이구나

그러나 본디 안팎이 한통속이어니
뒤집어진들 어이할꼬

어금니에 몇 톤의 원한을 싣고 가는 사내여
항문과 입술의 조직은 동일하다
잘린 가지 끝에 송곳니처럼 흰 뿌리 돋는다

머물렀던 곳마다 흘린 머리카락을 주우며
검은 날개를 꿈꾸는 밤
다르게 시작하는 법을 알지 못한다면
열두 개의 가면을 준비해야 할 것이다

누구나 제 얼굴이 무서워질 때를 맞이하므로
문득 어둠 속의 눈과 마주칠 때
고독은 완성될 것이다

그늘을 흔들기 위해 바람이 분다
빨래통 속에서 팔과 다리가 뒤엉킨다

창밖에는 비닐이 사납게 펄럭이는 소리
빈 액자 위에 내려앉는
고요한
먼지의 춤


 

 

*시인의 말

고향에선 일찍 죽은 여자의 입에
쌀 대신 쇠를 물렸다고 한다.

입술에 앉았던 물집이 아물어간다.
혀는 자꾸만 상처를 맛보려 한다.


'한줄 詩' 카테고리의 다른 글

뇌물과 유서 - 허혜정  (0) 2018.06.08
그리운 시절 - 서영택  (0) 2018.06.08
이름 뒤에 숨은 것들 - 최광임  (0) 2018.06.08
시래기 - 육근상  (0) 2018.06.08
喪家는 아늑하다 - 김응교  (0) 2018.06.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