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눈꺼풀 그 장막 - 윤의섭

마루안 2018. 6. 4. 21:30



눈꺼풀 그 장막 - 윤의섭



보이지 않는 끈으로 어디선가 잡아당기는 것처럼

한쪽 눈꺼풀이 경련을 일으킨다

그날은 무심코

신문에 난 사람 찾는 광고를 보았다

이십 년 전에 찍었다는 사진 속의 얼굴은

아무것도 모르는 게 분명하다

자신이 기억할 수 없는 시절이

어느 세상에선가 보관되고

떠오르지 않는 날들의 수면을 바라보게 될 운명

그곳을 떠난 뒤에 살고 있는 세상은 어느 날 급조된 세상이다

그가 바라보는 산과 하늘까지

그에게 스며든 사랑하는 여인의 향기와 꿈결

그의 자랑스런 상장까지

모두 그를 안심시키고 속이기 위해 생겨났다

지금도 그의 잊혀진 날을 보듬고 있는 세상에선

애타게 신호를 보내오고

내 한쪽 눈꺼풀은 계속해서 경련을 일으킨다

거기선 이미 죽었을 거라고 여길지도 모른다

시간이 지나자 경련은 희미해지고

나는 누군가를 잃었을 때처럼 가벼워진다



*시집, 말괄량이 삐삐의 죽음, 문학과지성








남사박 - 윤의섭



집에서 한 이 리쯤 떨어진

남사박 저수지에서는 해마다 한 명씩 꼭꼭 익사했다

물 속으로 꼭꼭 숨은 뒤에 산 모습으론 떠오르지 않았다

어떤 해엔 시체조차 건져내지 못했고

검푸른 물 속에선 무얼 먹는지

커다란 잉어가 지그시 배 깔고 산다는데,

어릴 적 저수지에서 헤엄치고 놀던 마을 사람들은,

물풀을 물귀신으로 믿고

섬뜩 놀라 쥐가 나거나 심장마비를 일으켜 죽은

친구들 문드러진 살국물을 조금씩은 다들 먹었고

벼농사 밭농사가 밑천이니

매년 그 물을 논 밭에 대어왔다


익사한 사람들의 무덤은

다른 이유로 죽은 사람들 무덤 사이에 놓여져

가려내기도 쉽지 않다 특별한 사망 원인으로 취급되지도 않았다

그들을 찾는 술래도 없다

조용한, 아주 조용한 무덤이다

마을은 산에 둘러싸인 분지인 만큼 개발도 퇴화도 더뎠다

마을은 자급자족했다

조용한, 무덤처럼 조용한 땅


남사박에선 예로부터 나물이 많이 났고

즐겨 먹는 먹거리이기도 했다

산에도 저수지 근처에도 무덤 사이사이에도

나물은 근근이 끼니 때울 때 무척 요긴했었다

남새밭, 이름 그대로 남사박은

무얼 먹고 자꾸 돋는지 시퍼런 나물이 매년 씨도 마르지 않고 있다






# 윤의섭 시인은 1968년 경기도 시흥 출생으로 아주대 국문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1992년 <경인일보> 신춘문예, 1994년 <문학과사회>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말괄량이 삐삐의 죽음>,<천국의 난민>, <붉은 달은 미친 듯이 궤도를 돈다>, <마계>, <묵시록>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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