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극락조 염전 - 최준

마루안 2018. 6. 4. 20:57

 


극락조 염전 - 최준


인부들이 잠들어 있는데
거품 파도를 일으키며 선풍기가 돌아간다
어디에도 바람은 보이지 않는데
소금 창고 그늘 찾아들어
소금자루 베고 잠든 인부들의 꿈속에서
극락조가 우는 한낮

주인공 없는 비극이다 소금을 먹지 않는 극락조는
숲 없는 바다에서 살지 않는다
적도를 오래도록 서성거리는 붉은 태양뿐
태양의 바다와 눈부신 개펄뿐

그늘 없는 극락이 어디 있다고
인부들이 버려 둔 삽날이 소금보다 더 반짝거린다
지난 우기의 천둥과 번개가 몸 도사리고
한낮을 이미 기운 그들의 삶이 저물어가듯

고집스럽게
선풍기가 돌아간다 인부들의 꿈 없는
극락조 없는 소금창고가 바다의 깊이로 넓어져 있다

바람이 분다 선풍기는 소금을 낳지 않는데
소라고동의 먼 휘파람 소리로
극락조가 울고 있다
극락조 은빛 울음만 눈부시게 쌓이고 있다


*시집, 뿔라부안라뚜 해안의 고양이. 문학의전당

 

 




이십 년 - 최준


이십 년 전 이발소에 걸려 있던 그림 속 나무들
나무들 사이 장님 요정들
머리 깎으며 문득 쳐다볼 때마다
저 숲엔 이발소가 없겠지
이발소가 없는데 사람이 있을 리 없겠지
'축 발전'이 있을 리 없겠지, 했다

발모제 광고를 심각하게 들여다보고
담배 피운 지 이십 년
밀림 속엔 길이 없겠지 천사들이
가위질하는 미용실도 없겠지, 하면서
보르네오섬 밀림으로 들어갔다
이십 년 전 타잔을 닮은 인부들의
벌목용 도끼를 따라갔다

두려움과 호기심 끝난 거기에
두 개의 길이 나 있었다
거대한 나무들이 쓰러질 때마다

한 개의 길이 생기고
길 하나가 사라지고 있었다
사라지는 길을 묘목들이 메우고 있었다
두 개의 길이 밀림을 교대하고 있었다

이십 년 후엔 또 바뀔 거야
나이테 없는 책상에 엎드려 잠만 자다가
어른이 된 아이들이 이십 년 전의 톱질소리로
사라졌던 옛 길을 복원할 거야

일 분마다 쓰러지는 나무들
그 푸름만으로
이십 년을 줄기차게 날아오르면
영혼의 날개들


 


# 최준 시인은 1963년 강원도 정선에서 태어났다. 1984년 <월간문학> 신인상에 시가 당선되어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1990년 <문학사상> 신인상에 시가 당선되었고, 1995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시조가 당선되었다. 시집으로 <개>, <나 없는 세상에 던진다>, <뿔라부안라뚜 해안의 고양이>가 있다.

 

'한줄 詩' 카테고리의 다른 글

눈꺼풀 그 장막 - 윤의섭  (0) 2018.06.04
빛의 거리 - 김해동  (0) 2018.06.04
인연에 관하여 - 박수서  (0) 2018.06.04
슬프다는 한마디가 목에 걸렸다 - 이기영  (0) 2018.06.03
미자의 오십견 - 박철  (0) 2018.06.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