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추리 - 김인호
-여름 지리산
무엇을 잊기에
지리산만치 좋은 곳 있을까
산수국물봉선비비추지리터리원추리
구름에 낯을 씻는 꽃천지 노고단에 올라
설핏 눈물자국 비치는 섬진강을
저기저기 좀 보란 말도 없이
그저 바라보아도 좋아라
지척도 아득한 마음일 때
지리산만치 좋을 곳 있을까
*김인호 시집, 꽃 앞에 무릎을 꿇다, 눈빛
금강초롱
-꽃 앞에 무릎을 꿇다
금마타리, 노랑물봉선, 금꿩의다리
인사를 나누며 오른 산정
금강초롱이 불을 켜들고 있다
아, 내 전생의 情人이었나
그립고 그립던 금강초롱
희뿌연 물안개 속에서
환히 빛나는 눈망울의 금강초롱
다리의 팍팍함도
아침을 거른 배고픔도 사라진
숨이 멎는 듯한, 한순간
꽃 앞에 주저 없이 무릎을 꿇었다
내 생의 몇 순간이
이런 환한 기쁨으로 채워질 수 있을까
# 지난 시집을 들추다가 보석처럼 박혀 있는 시를 발견했다. 들꽃과 시를 사랑하는 시인의 마음이 오롯이 담긴 구절을 옮긴다.
*꽃 속에 지나온 길이 있다. 꽃 속에 나아가야 할 길이 보인다. 꽃 속에 내가 있고 그대가 있다.
지난 다섯 해, 이 산 저 들로 들꽃을 찾아다녔다. 어떤 때는 일렀고, 어떤 때는 늦었다.
사는 일이 그러하듯 절정일 때를 딱 맞춘다는 일은 어렵다.
때로는 설악산 십이폭포에 미끄러져 겨우 빠져나온 적도 있었고, 동강할미꽃을 만나기 위해서는 로프를 매고 수십 길 벼랑에 매달리기도 했다.
그렇게 어렵게 만난 꽃과 눈을 마주치는 환희의 한순간이 지나고 나면 꽃의 자태보다는 늘 삶의 성찰이 앞선다.
꽃처럼 맑다는 말, 싱그럽다는 말처럼 나의 삶도 조금씩 맑아지고 싱그러워져서 꽃의 향기,
꽃의 말까지 받아들일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람으로 선연한 꽃 앞에 기꺼이 무릎을 꿇었다.
꽃 같은 그대의 향기, 꽃 같은 그대의 말 없는 말까지 받아들일 수 있도록
이제 나의 詩 또한 그대 앞에 기꺼이 무릎을 꿇겠다. -2009년 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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