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릴케와 장미와 - 이은심

마루안 2018. 6. 3. 18:32

 

 

릴케와 장미와 - 이은심


장미를 꽂았던 꽃병이 깨졌다
깨진 조각마다 사탄의 요염한 옆얼굴이 새겨져 있다
날마다 나는 잔걱정을 갈아주었을 뿐 멈춘 적 없는
그대 순수 속으로 한 뼘도 들어가지 못했다

늑골 아래, 수없이 돌아서며 많이 운 곳
한 덩이 주먹밥처럼 뜨겁게 뭉쳐있던 추억이 욱신거리며 흘러나가고
누가 나 몰래 나를 불 지펴 어느 하루 일 만 송이 황홀히 타오르던
4월 지나 6월

다만 지금 이윽히 날 저무는데 흩어진 아픔을 쓸어모아 내 한 때 뭉클했던 그 가슴으로 먼저 서 있으면 이 세상 아니듯 그대 그저 피기만 하라

스스로 베인 손을 감싸 안고 더욱 살아갈 무슨 이유가 있어 바닥을 치는가 이 눈부신 파편
무릅쓰고,
지상의 어디 한 군데인들 꽂힐 곳 없을 때 꽃은 진다 그러다가
지는 것조차 그친다

 

 

*시집, 오얏나무 아버지, 한국문연

 

 

 

 

 

 

배추흰나비 부인 - 이은심

 

 

내 나이 썰물 같은 서른에

거름밭에 맨몸으로 뒹굴던 여자를 만나 살림을 차렸지요

첫사랑에 실패하고 농약 먹고 죽을 뻔한 일이며

젖배 곯아 까맣게 타들어가던 험악한 시절을

김장시장 순댓국밥집에서 처음 만나 처음 만나 훌쩍일  때

면천을 바라기는

저나 나나 일반이라 가짜 알반지로 서푼짜리 생애가

잠시 반짝였지요 꼬갱이 살빛에

노란 화냥기가 돌기는 했어도

빼곡 찬 속내며 푸근한 몸집이 웬 복 터진 늦장가인가 했는데

 

동짓달 저녁 답

소금장수 하룻밤 묵어간 게 화근이라

때깔 고운 아들 딸 양념으로 끼워 넣을 꿈이

저나 나나 한 이불 속일 터인데

퍼뜩 등줄기를 달리는 한기(寒氣) 아뿔싸,

그새 소금장수와 눈 맞아 한통속이 될 줄이야

후끈 달아오른 몸뚱어리

고춧가루 젓국 항아리에 눈물범벅 곰삭으면

옛 정분 자박자박 우러나게 될라나요

새초름한 눈웃음 네 밥 내 밥 얹어주며

옛말하고 살라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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