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저녁이 오고 있다 저토록 아름다운 - 조길성

마루안 2018. 6. 3. 19:25



저녁이 오고 있다 저토록 아름다운 - 조길성



밥통을 끼고 앉아 눈 먼 밥을 먹으며
생각이 깊다


지난여름이 떨구고 간 그림자에
피가 묻어 있었나


나무에 매달려 몽둥이찜질을 당하는 개의 눈빛
그 푸른 광채가 보인다


뱀이 지닌 독니 그 끝에서 빛나는 독액의 아름다움은
두려움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


사람이 숨을 거두는 순간 이십일 그램의 무엇인가가
몸에서 빠져 나간다는데


누군가 마당을 가로지른다 붉은 꼬리를 가졌다



*시집, 나는 보리밭으로 갈 것이다, 도서출판b








뜨거운 열매 - 조길성



땀으로 절어 구두가 썩을 때까지 뛰어다닌 적 있었다
콧구멍 속 콩알이 익을 정도로 열심히 살아본 적도 있었다
흘린 땀이 말라 반짝이는 소금을 모아 놓으면
소금가게 하나 차리겠다며 웃음 지은 적 있었다
질통 지고 벽돌 지고 오르내릴 때
언젠가 이런 집 한 채 장만해야겠다고
눈빛 반짝이던 날들이 있었으나
지나보니 알겠다
산다는 것이 얼마나 뜨거운 열매인지를
먹으려 들면 입술부터 녹아내리고
이가 술렁술렁 빠져 내리고
혀가 흘러내리는 일이라는 것을





# 참으로 소극적인 아이는 어머니의 유전자를 닮았다. 엄마는 청개구리가 걱정이 되었다. "저 놈이 커서 뭐가 되려나 몰라." 먹고 사는 일이 절박하자 엄마는 억척스런 남자가 되어갔다. 선생님도 이런 질문을 했다. "넌 커서 뭐가 되고 싶니?" 두 질문에 다 대답하지 않았다. 뭐가 되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라 가만히 있어도 저절로 자라 어른이 되면 무엇이든 될 줄 알았던 걸까. 눈물은 점점 말라가고 입만 살아서 날마다 음식을 집어 넣는 철부지 중년이 되었다. 살아 있는 것이 너무 고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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