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개를 위한 변명 - 이동훈

마루안 2018. 6. 3. 19:00

 

 

개를 위한 변명 - 이동훈


먹지 못하면 개꽃, 반반치 못하면 개떡, 시원찮으면 개꿈이다. 어엿한 새끼도 개를 앞에 두고 욕을 보인다. 남의 족보를 허락 없이 가져가서 개망신 주는 꼴이니 개로서는 어처구니가어벗다 할밖에.

굴러먹다 온 개뼈다귀 출신이 개수작 부린다고, 개똥도 모르면서 병나발 개나발이라고 닦아세울 것 같으면 개구멍이 다 그립고, 있지도 않은 개뿔로 창피를 주니 개 낯짝도 붉어질 지경이다. 저들끼리 남남하다가 새판 짜고 이판사판 몰려 딴판 벌리더니 개판이란다. 죽 쒀서 개 준 꼴이란다. 개 말로 죽이라도 한 술 떴으면 덜 억울할까.

개소주 대러 개장수 나서는 인기척이 이보다 슬플까. 당겨진 개줄 같은 긴장이 이보다 싫을까. 털레털레 마을돌이 나설 때면 개나리 푸지게 늘어서서 개털끼리 좋은 봄이라며 노란 입술 비비는 것이다.


*시집, 엉덩이에 대한 명상, 문학의전당

 

 




다락이 있는 풍경 - 이동훈


다락의 목록은 간단하다. 앞자락이 뜯긴 비키니 옷장 하나, 그 안에 요긴하진 않으나 버리기는 뭐한 유행 지난 헌 옷가지들. 옆구리 터진 라면 박스, 그 밑에 다시 읽을 것 같지 않은 바둑 입문이나 권법 수련 책, 그 위에 개근상 삐져나온 졸업 앨범에다 권수가 안 맞는 무협지 몇 권. 철제 책상의 아귀 틀어진 서랍, 그 안에 이제 연락을 끊은 사람들의 편지까지.

다락의 목록을 추가한다. 어둠을 방해하지 않을 만큼의 작은 창, 그 창을 통해 보이는 건넛집 불빛에 얼씬하는 그림자, 그로 인해 놀게 되는 가슴. 베개를 꺾어 가슴에 괴고 엎드릴 때 머리카락에 닿는 서늘한 장판, 등을 대고 돌아누울 때 창밖으로 지나는 높쌘구름, 볼을 적시던 눈물 한 줄기, 기척 없이 있어야 들리는 쥐 발자국 소리까지.

나무계단 위 공중에 잇대어 달아놓은 높고 외로운 자리, 백세각*에 와 다락의 목록에 꿈을 적는다. 불운한 시대와 맞서려는 더워진 말들이 문풍지에 남아 울 때 요람처럼 아늑하고 시래기처럼 존득한, 저녁놀 타고 붉게 번져가기도 하고, 마법 양탄자처럼 하늘을 날아가기도 하는, 지금은 잃어버린 그 꿈을, 다락이 있는 풍경이 조금씩 흔들어주고 있다.


*백세각: 경북 성주군 초전면 고산리 소재. 여기 다락방에서 독립운동을 논의했다고 함.

 

 

 

# 이동훈 시인은 1970년 경북 봉화에서 태어나 대구에서 성장했다. 영남대 국어교육과 및 교육대학원을 졸업했다. 2009년 월간 <우리시> 신인상을 수상하며 등단했다. <엉덩이에 대한 명상>이 첫 시집이다. 고등학교 국어교사로 재직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