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나가는 길 - 박남원
누가 와서 묻거든
누가 와서
반쯤 허전해 하는 얼굴을 하고
그 역시 바람부는 달밤의 길을 건너와
표정도 없는 흐릿한 음성으로 나를 묻거든
떠나더라고
아무 것도 남기지 못하고 떠나더라고.
노상 바람은 그렇게만 불고
창문 밖 부딪치는 이슬 떨어지는 찬 이슬을 밟으며
꺼진 보안등 밑을
말없이 떠나가더라고
그의 물음은 한낱 내 없는 배경에 와서 머무르고
몇 마디의 머뭇거림도 멎은 후
세상에 나서 한번도 날아보지 못한 나무새
그림자는 탁자 위에 늘 엎드리어 있고
철제 난로 속
손짓하다 손짓하다 떨어지는 불의 꽃잎들
바라보고 있을 때
그는 비로소 알리라
있어야 할 곳에 그대 없음을
그렇게 많은 물살이
그대와 내가 그리고 또 다른 남이
하나씩 모여 한곳에 고이기도 전에
여기는 우리가 너무 성급히 떠밀려온 곳임을
돌아갈래야 지금은
달리 돌아갈 데도 없고
밖에서도 불의 꽃잎들 바람에 날리는
지금은 단지 울 수도 웃을 수도 없는 그런 시간임을
그대 비로소 알리라.
*시집, 막차를 기다리며, 한길사
독사탕 - 박남원
물먹은 맵쌀빛처럼 하얀
우리 어린 날 먹던 알사탕
돌을 독이라 부르는 전라도 말로
한 알 물면 십리 가는 독사탕 있었지
보절국민학교 후문에서 한 알을 물면
오수장터까지 갈 수도 있던
우리동네 가난보다 질겼던 단단함
국민학교 일학년인가 이학년 때인가
논두렁마다 쑥싹 돋던 쌀쌀한 봄날
검정고무신 닳아빠진 신발을 신고
남원에서 오수 가는 버스를 뒤따르며
한 알씩 입에 넣던 그 독사탕
그때 그 단단함도 단단함이었지만
깨물지 않고 인내로 기다리면
독사탕 맨속에 깨알 하나 있지
긴 시간끝 눈물처럼 발견한 목숨 같은 씨
돌멩이로 사정없이 내리쳐도
그 깨알 하나만은 죽지 않고 독하게 살아
버짐난 아이들의 즐거운 희망이었지
자랄수록 가난은 좀체로 떨어지지 않고
우리의 뒤통수나 옷자락을 잡고 늘어졌지만
그때 그 시절 같이 놀던 칠산이 녀석
중학교를 졸업하고 서울에 올라가
그 흔한 공단의 기능공이 되어
아직도 가난을 쫓아내지 못하였지만
독사탕처럼 살아가는 가난의 후예들
임금인상 투쟁이나 복직투쟁에
한번도 뒤로 물러서지 않는 독한 투사가 되어
거센 탄압에 한 순간 부서져도
맨속의 깨알의 희망으로 또 다시 살아
쟁취할 때까지 죽지 않고 끝까지 살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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