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떠나가는 길 - 박남원

마루안 2018. 5. 31. 19:58

 

 

떠나가는 길 - 박남원

 

 

누가 와서 묻거든

누가 와서

반쯤 허전해 하는 얼굴을 하고

그 역시 바람부는 달밤의 길을 건너와

표정도 없는 흐릿한 음성으로 나를 묻거든

 

떠나더라고

아무 것도 남기지 못하고 떠나더라고.

노상 바람은 그렇게만 불고

창문 밖 부딪치는 이슬 떨어지는 찬 이슬을 밟으며

꺼진 보안등 밑을

말없이 떠나가더라고

 

그의 물음은 한낱 내 없는 배경에 와서 머무르고

몇 마디의 머뭇거림도 멎은 후

세상에 나서 한번도 날아보지 못한 나무새

그림자는 탁자 위에 늘 엎드리어 있고

철제 난로 속

손짓하다 손짓하다 떨어지는 불의 꽃잎들

바라보고 있을 때

그는 비로소 알리라

있어야 할 곳에 그대 없음을

 

그렇게 많은 물살이

그대와 내가 그리고 또 다른 남이

하나씩 모여 한곳에 고이기도 전에

여기는 우리가 너무 성급히 떠밀려온 곳임을

돌아갈래야 지금은

달리 돌아갈 데도 없고

밖에서도 불의 꽃잎들 바람에 날리는

지금은 단지 울 수도 웃을 수도 없는 그런 시간임을

그대 비로소 알리라.

 

 

*시집, 막차를 기다리며, 한길사

 

 

 

 

 

 

독사탕 - 박남원

 

 

물먹은 맵쌀빛처럼 하얀

우리 어린 날 먹던 알사탕

돌을 독이라 부르는 전라도 말로

한 알 물면 십리 가는 독사탕 있었지

보절국민학교 후문에서 한 알을 물면

오수장터까지 갈 수도 있던

우리동네 가난보다 질겼던 단단함

 

국민학교 일학년인가 이학년 때인가

논두렁마다 쑥싹 돋던 쌀쌀한 봄날

검정고무신 닳아빠진 신발을 신고

남원에서 오수 가는 버스를 뒤따르며

한 알씩 입에 넣던 그 독사탕

 

그때 그 단단함도 단단함이었지만

깨물지 않고 인내로 기다리면

독사탕 맨속에 깨알 하나 있지

긴 시간끝 눈물처럼 발견한 목숨 같은 씨

돌멩이로 사정없이 내리쳐도

그 깨알 하나만은 죽지 않고 독하게 살아

버짐난 아이들의 즐거운 희망이었지

 

자랄수록 가난은 좀체로 떨어지지 않고

우리의 뒤통수나 옷자락을 잡고 늘어졌지만

그때 그 시절 같이 놀던 칠산이 녀석

중학교를 졸업하고 서울에 올라가

그 흔한 공단의 기능공이 되어

아직도 가난을 쫓아내지 못하였지만

 

독사탕처럼 살아가는 가난의 후예들

임금인상 투쟁이나 복직투쟁에

한번도 뒤로 물러서지 않는 독한 투사가 되어

거센 탄압에 한 순간 부서져도

맨속의 깨알의 희망으로 또 다시 살아

쟁취할 때까지 죽지 않고 끝까지 살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