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방아깨비의 노래 - 임성용

마루안 2018. 6. 1. 20:03



방아깨비의 노래 - 임성용



아부지는 술독에 빠져 살았다.
쟁기를 논물에 처박아두고
단오 지나 울타리 대추나무가 시집을 가도록 모를 내지 않았다.


저 썩을 놈의 인사가 사람이 아니라 웬수여 웬수!
맨발, 동동동동


동네방네 사정으로 놉을 얻어 모를 심는 엄니, 울 엄니
못밥을 이고 진등뫼 똥산등 넘어가면서
누군들 풀어주기만 해봐라, 콱 모가지를 틀어불 것이여
술에 취한 아부지를 감나무에다 꽁꽁, 묶어두었다.


내 몸통보다 두 배나 큰 감나무
옴짝달싹 못하고 새끼줄로 손발이 동여매진 아부지
소 거름에서 흘러나온 똥물이 옷이 잠방 젖었다.
아이말다, 이것 좀 얼른 끌러주라야
감나무 그늘이 돼지막 뒤로 넘어가버린 한낮
학교에서 파한 나는 책가방을 평상에 던져놓고
슬그머니, 새끼줄을 풀어주었다.


이런 호랭이가 물어 죽일 놈!
못밥 그릇을 이고 돌아온 엄니는 대나무 작대기를 들고
내 등짝을 사정없이 후려쳤다.
쨍쨍, 매미 소리처럼 울며 나는 집 밖으로 쫓겨났다.


덧고개 산밭 갈참나무 그늘에서
아부지는 흥얼흥얼 잠들어 있었다.
나는 풀밭에서 방아깨비를 잡고 놀았다.
다리가 붙잡힌 방아깨비는 앞으로 펄쩍, 뛰어가고 싶어
방아를 찧었다, 동동동동
나는 아부지 팔을 베고 누워 아부지랑 같이
풀빛처럼 곤한 잠에 빠져들었다.



*시집, 풀타임, 실천문학사








밤차를 타고 - 임성용



겨울이었으면
눈이 오지 않고 매운바람이 부는 저녁이었으면
언제 해가 진지도 모르게 날이 저물고
나는 밤 기차 안에서
흔들리는 차창 밖의 어둠을 바라보고 있었으면
불빛 한 점 보이지 않는 마을이 지나가고
싸늘하게 흔들리는 빈 들판이 지나가고
강물에 뿌리를 뻗어 한 몸으로 얼어붙은 갈대숲과
갈대숲 냉방에서 하룻밤을 묵고 있는 새들의 一家
내가 쓸어버린 냉가슴 차마 차갑고 아프다 말하지 말았으면


밤차는 한 마리 후줄근한 짐승처럼
남으로 남으로 달리고 또 달려
내가 도착한 곳, 그곳은
어린 내가 태어나고 자란 오래된 역전이거나
멀리 바다가 보이는 낯익은 마을이었으면
역전 마당에는 백 년도 넘은 향나무가 서 있고
그 향나무 아래 등을 기대고
언젠가는 꼭 한번 만나고 싶었던 사람이
가만히 내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으면


짧은 시간, 그 사람과 마주 앉아 차를 마시는 찻집이
나무 계단이 삐걱거리는 2층이었으면
짙푸른 바다가 바라보이는 방파제 부근이었으면
나는 그 바다로만 멀리 눈을 돌려
어느 순간 소리도 없이 그만 울어버렸으면
바다처럼 푸른 눈물이 흘러 밀려오는 파도를 밀어내고
그 사람이 살짝 잡은 내 손을 내려놓고 먼저 나가고 나면
나는 다시 밤차를 타고 바다 건너
남으로 남으로 여행을 떠났으면





# 지금은 사라진, 다시는 볼 수 없는 풍경들이다. 고속 기차가 서울 부산을 3시간도 안 되게 달리고 모든 농사가 기계로 바꼈다. 예전의 아부지들은 왜 그리 게으르고 술을 많이 마셨을까. 술, 노름, 가난의 굴레,, 당시의 소박한 풍경과 가난이 낭만이 될 수 없는 이유다. 시인보다 내가 더 지독한 풍경을 몸으로 겪어왔기 때문이다. 다시는 돌아가고 싶지 않은, 돌아보고 싶지 않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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